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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식 인문학칼럼] 소리 보살 이화중선 - 경북신문
이 땅에 불쌍한 한 여인이 살다 갔다.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소리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화중선이다.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당 서정주 선생님 때문이다.   1996년 어느 문학 모임에서 미당 선생님의 댁인 `봉산산방`을 방문하였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이화중선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그해 미당 선생님의 대구 문학강연을 서울에서 대구까지 동행하여 모시고 오게 되었는데, 남현동에서 김포 공항까지 상습 교통체증의 올림픽대로 차안에서 이화중선의 노래를 들려 드렸다. 흡족해하시던 두 내외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미당 선생님께서도 그녀의 삶에 대해 일찍이 노래하였는데, 바로 `바위옷`이라는 시이다   일정의 식민지 조선반도에 생겨나서기생이 되어서, 남의 셋째 첩쯤 되어서,목매달아서 그 모가지의 노래를 하늘에 담아버린이십세기의 우리 여자 국창 이화중선. - 미당 서정주의 `바위옷` 일부   그녀의 삶을 더듬어보면 눈물부터 먼저 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소리를 제외하면 슬픔이 전부다. 그녀는 1898년에 목포에서 갈빗대가 하나 없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세 살 때 사망하자 부산 동래의 작은 할아버지 댁에 맡겨져 8살 때까지 얹혀살았다. 13살 때 아버지가 있는 남원으로 왔지만, 의붓자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광한루 근처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나중에 남원 권번에 적을 두었다.  그곳에서 어깨너머로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 셋 딸린 바보 남자와 결혼하기도 했는데 시숙으로부터 노래를 배우기 위해서 였다. 또한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살기도 했다. 동네에 찾아온 협률사 공연을 보고나서 판소리를 배우고 싶어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갔다.   26세 때 전국 명창대회 때 심청가의 `추월만정`을 불러 드디어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1928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유성기 음반 `추월만정`과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데`를 취입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기 이름을 내건 전국 순회공연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돈을 가마니에 쓸어 담았다고 한다. 일거에 스타가 된 것은 소리뿐만 아니라 막 나온 유성기 음반과 극장,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창극집과 독집 유성기 음반 70여 장의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겼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그녀의 삶만큼 허망하다. 그녀는 일본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 위로공연을 갔다가 이국의 바다 위 선상에서 마흔여섯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이 엇비슷한 사의 찬미 윤심덕이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았던 것과는 달리 이화중선은 희미하게 잊혀져 갔다.이화중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국악인을 제외하면 극소수일 것이다. 자료를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뜻있는 분들이 계셔서 참으로 반갑다.   이화중선의 생애를 모래밭에 바늘 찾듯 낱낱이 추적하여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긴 김용근 선생님, 판소리 기행 `수필 판소리 실크로드` 시리즈로 이화중선의 삶을 찾아나선 이주리 시인, 그리고 소설 `이화중선`을 쓴 남원 출신 최정주 작가 등이 그녀의 삶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힘든 시절 나라 잃은 서러운 민초들에게 그녀의 노래는 위안을 가져다주었으며 우리 고유의 노래 판소리를 승화시켰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유학파 신여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화중선은 말 그대로 진흙 구덩이에서 핀 연꽃과 다름없다. 그저 시골 아낙네에서 살다 늙어버릴 수 있는 삶이었지만 소리를 통해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삶을 창조해낸 여인이기에 더 존경스럽다.   대중적으로는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을 가장 슬픈 노래로 꼽는다지만 이화중선의 노래를 들어본다면 달라질 것이다. 가슴 쥐어뜯는 진양조 느린 박자의 남도잡가 육자배기,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심청가의 `추월만정`그리고 춘향가의 `사랑가` 등이 그러하다. 그녀의 소리가 슬픈 것은 그녀의 삶이 바리데기였고 심청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 세상에 와서 남긴 것은 오로지 소리 하나 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이 그녀를 소리 보살로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2-03-03 오후 09:09:55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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