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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식 인문학칼럼] 찰리 채플린을 위한 우나 오닐의 only you, only love - 경북신문
세상에는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는 일들이 일어나듯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 힘든 사랑 또한 존재한다.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의 경우가 그렇다.   채플린이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최고 희극배우, 천재 코메디언, 마임 예술가 그리고 영화산업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최고의 연기자 아니었던가.  찰리 채플린은 확실히 성공한 배우였지만 세 번 결혼하고 이혼한 경력이 있고 숱한 스캔들이 있었다. 그와 결혼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스무 살 미만의 여자들이었기 때문에 채플린을 두고 미성년자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남자로 분류한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 여자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덕을 좀 보기 위한 목적을 가진 연기 지망생이거나 배우로 성공을 꿈꾸는 여인들이었다. 반대로 채플린은 연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감 있는 결혼생활을 원하였다.   우나 오닐은 노벨문학상과 플러처상을 받은 미국을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다. 할리우드에 첫발을 딛었을 때 그녀가 최고의 스타가 되거나 아니면 최고 스타와 결혼할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을 처음 보았을 때가 17세 때였다. 검은 머리에 상냥하고 교양있는, 더군다나 미인대회에 수상까지 있는 아일랜드계 여인을 채플린 또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이도 많고 적잖은 스캔들을 일으킨 그가 애정을 표현할 처지는 못 되었다 다행히 우나 오닐이 다가왔고 채플린을 사랑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밝혔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우나 오닐을 좋아하고 있었고 글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작가가 되리라고 결심한 상태였는데 그것도 나이가 많은 채플린과의 결혼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쓰라린 노력을 더한 끝에 최고의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나 오닐은 18세 되던 해 아버지보다 한 살 적은 54세의 찰리 채플린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극구로 반대했지만 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스무 살도 안된 자기 딸이 못생기고 땅달막한 자기 또래의 남자와의 결혼을 어느 부모가 찬성하겠는가? 더구나 당시 채플린은 조안 배리라는 여자와 친자확인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중에는 유전자 감식 끝에 양육비를 지급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더이상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게요` 부모님과 약속한 이 말을 죽을 때까지 끝까지 지켰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 달리 채플린의 돈과 명성을 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 늘 웃고 웃겨야 하는 채플린의 뒷모습과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울지 않기 위해 웃는 법을 배워야 했던 채플린의 내면을 읽었다. 슬프지 않으려고 혼자 있는 시간에 판토마임 놀이를 하던 그 어둠과 그늘을 이해하였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했다.  우나 오닐 집안 또한 3대째 알콜과 약물중독으로 얼룩진 집안이었다. 형제 중 오로지 그녀만이 정상일 정도였다. 아버지 유진 오닐 또한 문학적 성공의 이면에는 알콜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우했던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기에 불가능할 것 같던 결혼이 성공할 수 있었다. 결혼 이후 찰리 채플린은 경제적인 것을 비롯한 집안 모든 일들을 그녀에게 맡기고 본인은 연기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결혼 이후에는 예전처럼 여자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은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정치적으로는 좌파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 `모던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같은 작품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메카시즘의 광풍에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미국을 벗어나 스위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감할 때까지 보란 듯 행복하게 살았다. 연 1천1백만 달러가 넘는 금액의 저작료가 꼬박꼬박 입금되고, 20여 명의 하인을 두며 우나 오닐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부부 금실이 얼마나 좋았던지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우나 오닐은 89세 나이로 채플린이 죽자 매일같이 묘지를 찾으며 그를 추모했다. 사후 4개월 뒤 어느 날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시신을 되찾고는 묘를 콘크리트로 봉인해버렸다. 콘크리트만큼 굳건하고자 했던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1989년 그녀 또한 채플린 무덤 옆에 나란히 누웠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랑은 대개 목적에 의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반해 채플린과 우나 오닐의 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오직 채플린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밖에 없었다. 현모양처의 미덕이 점차 희미해지는 오늘날 우나 오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왠지 크게만 느껴진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2-03-03 오후 09:09:55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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