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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생활칼럼] 부칠 수 없는 편지 - 경북신문
낙엽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늦가을 어느 날이다. 따사롭던 햇살이 점점 옅어진 탓인지 때 이른 한파마저 찾아와 쌀쌀한 날씨다.   오후 녘, 조깅을 하기 위해 집 앞 호숫가를 찾았다. 한참을 뛰노라니 숨이 차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를 때다. 저만치 호숫가 둘레길 의자에 앉아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남성이 눈에 띄었다.   둘레길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는듯 한 쪽 손에 들려진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자꾸만 눈물을 훔친다.  그 앞을 지나치며 얼핏 살펴보니 그 남자의 한 쪽 손에 들린 누런 빛바랜 종이엔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다. `러브 레따`라고 서툴게 쓰인 제목이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니 다소 물기에 의하여 번진 듯 뭉개진 흐릿한 글씨다. ` 여보, 된장 끓여놨으니 덥혀 자시소` 라는 글귀가 그것이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예사롭지 않은 문구임을 직감했다.   남자 앞에 선 채 그 종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연신 눈물을 닦는 남성과, 종이에 적힌 문구를 번갈아 바라보자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문을 연다.  "아주머니, 이 글귀를 읽고 왜 이리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리는지 도저히 차량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라며 그 남성은 눈물이 흥건한 눈을 들어 낯선 내게 손에든 한 장의 종이를 보여준다.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니 `러브 레따`라고 서툴게 쓴 글씨 옆엔 붉은 색 싸인 펜으로 그린 듯한 하트 모양도 또렷이 있다.   이를 본 후 영문을 몰라 해 하자 그 남성은, " 어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분이 생전에 사용하던 짐을 처분하려고 아파트에 들어가 보니 냉장고 옆에 이 글이 붙어있었습니다" 라고 한다.  또한 이 글 뿐만 아니라 냉장고 겉 표면 전체가 할아버지가 생전에 고인인 자신의 아내를 생각하며 쓴 글들이 빈틈없이 뒤덮여 있는 것을 보았단다.   그러면서 그것에서 떼온 종이 뭉치를 가방에서 꺼내 보인다. 대충 몇 장 읽어보니 일상에서 아내와 함께 했던 지난 추억들을 되돌아보며 쓴 글들이 다수다.  어느 내용은 종이색도 누렇게 빛도 바래고 글씨체도 반듯한 것으로 미뤄보아 꽤 오래전 쓴 글인 듯하다.  " 오늘은 살을 에는 바람이 불더니 뒷 베란다 수도관이 얼어붙어 세탁기가 안돌아가오. 당신이 수돗물을 조금씩 틀어놓으라고 부탁한 말을 깜빡 잊어서 손빨래 하느라 어깨가 아프구려"를 비롯, " 아파트 앞 정원 감나무 아래 홍시가 떨어져 얼른 한 개 주웠오, 홍시를 좋아하는 당신 주렵니다" 등은 얼마 전 쓴 글인 듯 글씨도 선명하고 종이도 깨끗하다.   그 남자 말에 의하면 이 글을 쓴 할아버지는 팔순을 훨씬 넘긴 연로한 분으로 슬하에 자녀도 없이 할머니랑 단둘이 살았단다. 하지만 할머니가 지병으로 수년 전 세상을 뜨자, 그 충격인지 치매를 앓다가 며칠 전 할아버지 역시 독거사 했다는 것이다.   그 남성이 할아버지 짐을 치우다가 이불 호청 속에 곰팡이가 잔뜩 핀 초코파이, 과자 등을 발견하곤 눈시울을 적셨다곤 한다. 그곳에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이 함께 담겨 있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할아버진 항상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거나, 함께한 추억이 묻어나는 물건을 보면 이불 호청 속에 넣어두고 꼭 편지를 쓴듯하다고 했다.   이불 호청마다 마치 마대자루에 물건들을 넣어둔 듯 잡동사니가 가득하단다. 그리곤 그것에선 빠짐없이 할머니께 쓴 편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로 옆에 정차한 자신의 트럭을 가리키며 차량 위 짐들이 할아버지가 생전에 쓰던 생활용품들이라고 했다.   먼 발치서나마 그 물건들을 바라보노라니 한 눈에 봐도 몇 십 년은 됨직한 냉장고, 낡은 소파, 가재도구가 전부여서 고인의 생전 삶을 짐작할 만 했다.  그 할아버지가 죽기 전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치매로 지난날 아내와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점점 기억 속에서 멀어질 때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고인인 아내에게 편지를 쓴 것은 아닐까?   비록 머릿속 지우개인 치매가 자신의 그토록 선명하고 정확했던 온갖 기억들을 깡그리 지워도 아내를 향한 사랑만큼은 오롯이 가슴에 살아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평소 치매에 시달리면서도 아내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순애보殉愛譜적인 할아버지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메모들을 읽으면서 시리도록 아름다운 할아버지의 아내를 향한 사랑에 가슴이 뭉클 했다.   요즘은 조강지처糟糠之妻의 의미도 많이 희석되고 있다. 조기 이혼에 이어 걸핏하면 황혼 이혼도 불사하여 결혼식 날 주례 선생님의 덕담 따윈 한낱 공허한 메아리가 된지 오래다.   이로보아 귀밑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자던 언약도, 오로지 당신만 사랑하겠다던 철석같은 맹세도 헌신짝이 된듯하다.   "바다로 나간다면 두 번 기도 하라. 결혼 생활에 들어간다면 세 번 기도하라" 라는 러시아 속담 문구가 무색할 지경이다.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부부의 사랑만큼은 변절 돼선 안 되잖은가.   늦가을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어느 할아버지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통하여 이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2-03-03 오후 09:09:55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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