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을 올랐다. 숨길 것 하나 없이 정직하도록 요구하는 겨울의 엄혹함에 나무들은 잎을 죄다 떨어내 버리고 강인한 뼈대로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밑에서는 마른 잎들이 바스락거리고 찬 공기 속에서 유리구슬처럼 영롱한 산새들의 지저귐은 내 몸에 묻힌 일상의 풍진(風塵)도 날려보낸다. 정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발걸음은 한껏 게을러진다. 걷다가 하늘도 올려 보고, 멈춰 서서 암자 근처 아기 주먹 크기의 빨간 감들을 무겁게 달고 있는 감나무에 날아와 맛있게 감을 맛보는 청설모를 지켜보기도 했다. 새나 짐승들을 위해 감들은 그대로 두라는, 암자의 스님이 산행하는 이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산 속의 주인은 동물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겠지.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오래 된 참나무의 높은 가지에 새둥우리처럼 연녹색을 띤 둥근 것들이 여러 개 달려 있다. 겨우살이들이었다. 어두운 색의 참나무 가지에 붙은 연녹색의 겨우살이들은 지금이 차디찬 겨울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했다.　 겨우살이. 다른 식물에 기생해서 겨울을 나는 상록 관목의 쌍떡잎식물이다. 늦가을에 싹을 틔워 겨우내 숙주가 되는 나무의 수액을 뽑아 먹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제 스스로 땅에 뿌리를 내려 물과 양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무에 기대어 그것을 나누어 가지며 살아가는 그것에게 참나무는 조용히 제 몸의 것을 나누어 준다. 어찌 보면 자신의 노력없이 숙주에 기생하는 얄미운 겨우살이지만 그렇게 얻은 자양분으로 겨우살이가 맺은 열매는 새들의 먹이가 되어 준다. 무엇이 무엇에게 무엇을 빼앗고 빼앗기는 관계가 아니라 이것이 받은 것을 저것에게 돌려주는 나눔의 순환이 된다. 　 잠깐 우리네 살이가 이 겨우살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로부터 몸을 타고 나서 부모의 자양분에 기대어 성장하면 그는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자기 자식에게 자기 가진 것 모두를 내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대의 순환이 아니던가? 부모는 자식이라는 겨우살이가 자라서 그도 누군가의 부모라는 숙주가 되어 다른 겨우살이를 싹 틔우고 키워갈 수 있도록 부모가 지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숙주가 된다. 게다가 사람은 자연물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모둠, 즉 사회(社會)라는 또 다른 숙주가 있어서 그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우고 받는다. 교양과 양심과 나눔의 책무라는 지적 자양분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필요한 덕목들이다. 　 `사람 인(人)`이라는 글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서 서로를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다. 글자를 이루고 있는 한쪽 다리가 나라면 나를 넘어지지 않게끔 지지해 주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서 있지 못하며, 다른 이도 또한 나의 지지와 도움이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알게 모르게 내가 이웃과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은 엄청나게 많지만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능력이 남달리 출중하기에 남다른 결과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나은 성과를 가져오려면 남을 앞질러야 하고, 경쟁사회에서 `기대어 살기`는 남을 앞지르는 데 방해가 될뿐이라고 생각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 균, 쇠`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더 뛰어난 문명을 이룩한 유라시아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보다 인종적으로 더 뛰어난 능력을 가져서 그러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유라시아가 지리적으로 더 비옥한 환경에 자리잡았기에 먹을 것에 충족되고, 그로부터 총도 가지고 균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오늘날 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른 것이 자신이 옛날 선조들이 뿌리내렸던 자연환경이라는 숙주의 영향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공동의 집(지구)에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이들은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지니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 냄비가 종을 딸랑거리며 무디어진 우리에게 자선을 일깨우고, 아무도 모르게 익명으로 거액의 기부를 했다는 훈훈한 소식도 들려온다. 지난 두 해 동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크나큰 재앙과 싸워왔다. 싸움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병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겨우살이처럼 살아야 하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숙주가 되어주어 이 길고 막막한 싸움을 꼭 이겨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