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 아직 볕이 따갑다 해도 가을은 이미 이울어, 산과 들의 지친 푸른빛은 노랗거나 붉거나 한 가을색에 자리를 내주고 떠날 준비를 한다. 　 먼저 오는 모든 것들은 뒤따라오는 것에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순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뒤따라 올 겨울이 주는 삭막하고 쓸쓸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름다운 가을색의 향연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자연의 순환은 어김없으니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기에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즐기며 보낼 수 있다. 　 얼마 전에 치러진 지방공무원 임용 시험을 본 후 제 방문을 닫고 열지 않는 아들을 보는 어미의 마음이 오히려 더 아프고 암울하여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차라리 함구하고 만다는 한 지인(知人)과의 전화 통화는 듣는 이도 덩달아 답답하고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게 하였다. 　 더 안타까운 것은 몇 해째 공무원 임용 시험을 준비하느라 다른 곳에 취업할 적령기조차 놓친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청년의 큰 절망과 고독이 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유례없이 심각한 구직난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20대, 30대 청년들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억(億), 억(億)` 소리가 나는 최근의 정치권의 행태일 것이다. 　 요행 취업이 된다 해도 과반이 넘는 구직자가 계약직으로 불안정한 취업을 하게 되고, 청년층들이 받는 급여 수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며칠 동안 연일 보도되는 일부 부도덕한 자들의 `억대의 퇴직금, 수천억대의 부동산 수입`은 좌절한 청년층들의 등을 디딤돌마냥 밟고 올라서 지근지근 밟아대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분노조차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어김없이 순환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갈 것`이라며, 지나간 시간은 또 다른 기회를 반드시 동반하고 올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지인과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어떠한 절망적의 조건이라도 극복할 힘을 가졌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며 문신인 상촌(象村) 신흠의 시조 한 수를 함께 음미해보고 싶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닐러 다 못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거시면은 나도 불러 보리라` (노래 만든 사람은 시름이 많기도 많구나. 말로 일러서 다 풀지 못할 시름 노래로 불러서나 풀었던가. 진정 노래 불러 풀릴 시름이면 나도 불러서 풀어 보리라.)　 삼공(三公)의 벼슬을 지냈으나 어지러운 당쟁과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 폐위 사건 등의 난정(亂政) 속에서 권력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겪은 신흠이 고향 춘천에 은둔하며 지어 불렀던 시조이다. 악마구리 끓듯하는 정쟁(政爭)에서 생긴 마음의 화와 시름을 차라리 노래로 불러나 풀어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서 마음에 가득한 해결책 없는 분노가 얼마나 자기를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는지를 이미 체득한 그는 오히려 노래라는, 한 겹 앙금을 갈아앉힌 방법으로 근심을 풀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상촌이 노래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려운 시대라는 파도를 타고 있던 그가 파도를 바로 보며 어지러움을 느끼기보다 고개 들어 먼 수평선을 보며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먼저 얻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몇 번의 시험 실패로 좌절하고 있을 지인의 아들, 또 그 외에도 숱하게 많을 오늘날의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마주한 파도의 맥놀이에 쉬이 꺾이지 않고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나의 바람도 함께 담아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