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생활칼럼] ˝당신 안 버릴게˝

“여보. 내가 당신 안 버릴께.” 앞뒤 맥락 없는 말에 남편이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어 “당신 끝까지 책임질게” 라는 말에는 뭔가 대꾸를 하려 입술을 달싹이더니 꿀꺽 삼킨다. 우리부부는 원래도 낯간지러운 말을 어색해하는 성격이다. 같이 산 햇수가 길어질수록 입술 위에 말은 아예 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분위기가 그리되어도 서로 못 들은 척하거나 엇비슷 비켜 웃고 만다. 나는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대출봉사를 한지 꽤 오래되었다. 이용자 몇몇 분과는 이런 저런 사연을 나눌만큼 친해졌다. 그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를 십여년간 돌보는 어르신이 계신다. 오늘은 요리책을 대출하시기에 직접 요리도 하시냐고 여쭸다. 아내가 밥투정이 늘어 맛난 것이 있나 살펴보려한다며 걱정 가득한 얼굴이시다. 곧 “처음보다 많이 좋아져서 요사이는 노래도 곧잘 불러요” 며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아내 분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라는 내 물음에는 그냥 웃더니 문득 잊은 것이 생각난 사람처럼 책을 챙겨 들고 바쁜 걸음으로 가셨다. 어르신 부부의 젊은 날은 어땠을까? 남편과 내가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어르신 부부 같은 상황이 되면 어떡하지? 나는 남편을, 남편은 나를 저렇게 돌볼 수 있으려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겁부터 났다. 부부는 서로를 보살피는 의무를 지는 사이다. 결혼하고부터 남편이 나를 부양했다. 비단옷에 부리는 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살았다. 고맙다는 말로 표현한 적은 없다. 해야 될 말은 삼켰고 도리어 안 해도 될 말은 넘치게 쏟아 부었다. 옆집 아저씨에 친구남편까지 끌어와 비교하고 자존심을 건드려대었으니 남이라면 벌써 의절하고도 남았으리라. 가끔 ‘쫒아내지 않고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도 감사하라’는 어불성설, 시대착오적인 남편의 농담이 어쩜 진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님이 남이 되기는 점하나 차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어제도 선심 쓰듯 얼굴에 팩 한 장 붙여주고는 잔소리는 바가지로 퍼부었다. 건강을 생각해라. 피부가 버석하지 않느냐! 술 그만 마셔라. 기름진 음식이 얼마나 해로운지 아느냐는 둥 누구나 아는데 피하기가 어려운 일들을 마치 학생 가르치듯 훈육을 해 대었다. 삼 십 년이면 돌부처라도 귀가 열렸을 시간이다. 반복학습 효과라도 나타날 때가 됐건만 아직도 먼 듯해 이즈음에는 선생의 자질을 반문하곤 한다. 그런데 남편 태도가 영 마뜩찮다. ‘고마워’나 ‘사랑 한다’는 대답을 기대한건 아니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 반응이 있겠지 했다. 평소의 남편이라면 아직은 끄떡없는 사내니 걱정마라며 큰소리를 칠 법한데 가만히 있다. 나만 없으면 자기 좋다고 올 여자가 줄을 섰다는 말 같지도 않은 배짱도 부리지 않는다. 소에게 사료를 주는 남편의 등을 바라봤다. 마른 짚 덩이가 무거운지 끙 소리를 낸다. 환갑이 되고부터는 몸이 후달리는지 쉬이 피곤해하고 건망증도 심해졌다. 백세 시대에 육십은 팔팔한 청춘이다. 아직 살아야할 날이 반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저러면 안 되는데 걱정스럽다. 아차! 내가 버티는 관절에서 힘 빼는 소리를 한건가보다. 남편의 팔뚝은 여전히 튼실하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안 해도 될 말을 그것도 앞당겨 했으니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애초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떫떠럼할텐데 말이다. 내 기분에 젖어 듣는 남편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지 못했다. 차라리 아프면 당장 버릴 것이니 아프지 말라고 엄포나 놓을 걸 그랬다. 우리부부는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해가며 지금껏 살던 대로 사는 게 맞았나보다. 그래도 한번은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이었다. “여보 내 뜻은 그게 아니야. 사랑한다는 말이었어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 황급히 뒷수습을 해도 개운하지가 않다. 당신 안 버리겠다는 말은 돌려보면 나도 잘 부탁한다는 말인데 남편이 내 마음을 알아들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