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라디오조차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기술 후진국 한국이 드디어 반도체 대국이 되었다. 반도체 칩은 크게 메모리 분야와 시스템 분야로 나누어지는데, 메모리칩은 말 그대로 기억소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시스템칩은 고도의 연산 작용을 하는 하나의 생각하는 소자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을 것 같은 시스템소자를 두고 오로지 기억소자(Memory chip)에 주력했을까? 물론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시스템분야 보다는 비교적 기술적 난이도가 낮은 메모리분야가 우선 반도체 입문에 용이하기도 했겠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와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박제된 지식의 암기 자체를 공부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란 사물의 철리(哲理)를 깨우쳐 지성을 키우고 사고(思考)하는 능력과 응용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어야 할 것인데, 어릴 적부터 단어를 외우고 공식을 암기하는 공부에다 시험지에 모범답안을 찍게 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만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학력과 지성이 전혀 비례하지 않는 이상한 아이들을 양산해 왔던 것이 아닐까?　 근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지도층 인사들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전인교육(全人敎育)을 거의 받지 못한 세대들로 보인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자말자 처참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까지 치르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된 그들은 오로지 생존이 도덕이며 윤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 이상의 선(善)은 없는 것이며, 그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동체 의식 같은 것은 대단히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척박한 벼랑 끝 바위틈에 서식하는 소나무일수록 솔방울이 많이 달린다.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병들어 죽고, 전쟁으로 죽고, 영아 생존율이 낮을수록 인간들에게는 더욱 강한 생식본능이 발동하는 법인가? 　 당장 내일 끼니꺼리가 없지만 다산(多産)이 미덕이던 그 때 그 시절 아이들은 이미 영아 때부터 치열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보리밥 한 양푼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형제들 틈에서는 밥을 빨리 먹는 아이일수록 더 많은 칼로리를 취할 수 있음으로, 자연히 취식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 빨리 문화도 그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보다 가장 빨리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살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모들의 교육열 역시 경쟁에서 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이 심리 저변에 자리한 탓도 없지는 않을 터인데, 학교 역시 전인교육의 전당이라기보다는 타인을 이기기 위한 단순한 생존 각축장으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성적과 석차 그리고 입시라는 무한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부모들은 오로지 타인과의 치부(致富) 경쟁에 몰두하느라 아이들에게 가정교육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으니,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기성세대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사회의 주류가 아닌가?　 우리는 드디어 메모리칩 경쟁에서 세계를 압도했다. 그러나 메모리칩은 아무리 빨라지고 고용량이 되어도 연산능력 즉, 생각하는 기능이 없다. 　 그러니까 사고하는 능력이 없는 메모리 두뇌를 가진 사람들에게 인격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며, 인격이 없는 지성이 괴물이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빨리 연산칩 사회로 급선회하지 않는다면 일 개인은 물론 산업도 나라의 미래도 없을 것이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정치개혁, 경제개혁 모두 좋지만 무엇보다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개혁이야말로 바로 교육개혁 의식개혁이라는 게 지금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