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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데스크칼럼] 우정의 사회학 - 경북신문
1953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K2 등반에 도전한 8명의 원정대가 있었다. 이 원정대는 각각 다른 나라에서 온 낯선 등반가들로 뭉쳐진 조합이었다. 초반에는 등반이 수월하게 이뤄져 이틀 후면 정상에 오를 수 있겠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몰아친 눈보라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일주일 동안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원정대 중 한 사람이 왼쪽 다리 혈관에 염증이 생기는 일이 생겼다. 춥고 높은 곳에서 염증이 생기면 그 염증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만약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 대원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상황에 이르렀다. 원정대는 그 대원을 위해 정상을 눈앞에 두고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했다. 그리고 안전한 베이스캠프로 그 대원을 후송하기로 결정했다. 대원들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고산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을 후송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부상자를 포기하지 않고 들쳐 업은 채 베이스캠프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천신만고 절벽을 타고 하산을 하던 중 한 대원이 미끄러져 추락을 하게 된다. 등반대들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모든 대원들을 한 줄로 묶어 움직인다. 대원 한 명이 절벽으로 추락하는 위험에 빠질 때 맨 위에 있는 대원이 끝까지 버텨줘야 모든 대원들이 무사해진다. 이 때 피터 스코닝이라는 대원이 그 역할을 맡았는데 설상가상 피터는 부상당한 대원을 업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터는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밧줄을 자신의 온몸에 감았다. 힘이 빠졌을 때 마음이 바뀌고 밧줄을 끊어버리면 나머지 6명의 대원을 잃게 된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피터는 사력을 다했고 그들은 모두 무사하게 살아남았다.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대원들은 밤을 맞았고 베이스캠프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텐트를 쳤다. 그날 밤 대원들은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텐트를 나서면서 부상당한 사람을 밧줄로 묶어뒀다. 그러나 대원들이 돌아와 보니 그 부상당한 대원이 사라져 버렸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대원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느낀 그가 스스로 밧줄을 끊고 사라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공동체의 운명이라는 명제가 생겼고 우정으로 똘똘 뭉쳤다. 피터 스코닝은 자신들을 살린 요인은 우정이라고 회고했다. 사라진 대원도 나머지 대원들에 대한 우정 때문에 스스로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대원을 살린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회 공동체로 진입할 때는 모두가 낯선 이들이다. 그러나 서로가 어떤 명분으로든 한 그룹으로 묶이게 되고 그 집단에서는 서서히 우정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인류의 역사가 이 우정 덕택에 얼마나 크게 진보해 왔고 얼마나 많은 위기를 넘겼는지 따져본다면 단순한 개념인 것 같은 우정이 천금과도 같은 가치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우정으로 위장한 다른 속셈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천성에서 티베트를 지나 네팔에 이르는 길을 `우정공로(友情公路·Friendship Highway)`라고 부른다. 형식적으로는 중국이 네팔과 자유롭게 왕래하기 위한 길을 닦고 새로운 개념의 실크로드를 개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속셈은 티베트의 독립투쟁을 조기에 차단하는 군사 이동로로 활용함과 동시에 네팔을 볼모로 삼아 인도와 대치하는 경계선을 넓히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우정을 가장한 도발인 셈이다.  이 같은 중국의 위장된 우정은 바로 강요된 우정이라는 데 허점이 있다. 우정은 말이나 선언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마치 실금 같은 도로를 하나 뚫어놓고 그 이름을 거룩하게 우정으로 갖다 붙인 것이다. 우정을 강요하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이웃나라 네팔에게 맹세를 하라는 듯이 윽박지르는 것이다. 네팔의 우정을 믿을 수 없으니까 맹세를 강요하는 것이다.  조국과 공동체는 우정으로 뭉친 집단이다. 여기에 우정은 집단 구성원의 자발적 각성으로 생겨난다. 누가 강요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오는 날 내 이웃이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을 때 고요하게 우산을 씌워주는 행위가 진정한 우정이다. 그럴 때 그 우정의 생명은 길다. K2를 등반하던 원정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발휘했던 우정은 지금 우리 사회에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 공동체를 지켜내고 산지사방 갈라진 국론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것은 반만년 켜켜이 쌓인 우정밖에는 명약이 없다.
즐겨찾기+ 최종편집:2022-03-03 오후 09:09:55 회원가입기사쓰기구독신청지면보기전체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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