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시간을 두고 `흐르는 물`, 혹은 `쏘아놓은 화살`이라고 빗대어 표현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직진만 하는 시간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절대불변의 원칙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시간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산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은 그 서사적 구조의 권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시황이 흐르는 시간을 역행하기 위해 불로초를 구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타임머신을 만들어 자유롭게 시간을 섞어보려 하는 과학자들의 노력도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희망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실현하지 못할 불가침의 영역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미국의 포크 싱어송라이터 짐 크로스의 `병속에 갇힌 시간(Time in a bottle)`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매우 낭만적이다.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The first thing that I`d like to do/Is to save everyday till eternity passes away/Just to spend them with you. (만일 시간을 병속에 저장할 수 있다면/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영원이 다할 때까지 모든 날들을/그대와 함께 쓰기 위해 저장하는 일.)" 단순한 연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었던가. 특히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을 때 그와 함께 영원을 같이하고 싶다는 욕망은, 젊은 날 어느 누구나 가졌던 것이리라.　 그처럼 흘러가서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한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비단금침에서 자고 기름기 흐르는 음식으로 평생을 보내는 황후장상에게도 지푸라기 덤불에 몸을 묻고 시래기로 죽을 쑤어 먹는 걸립패에게도 시간은 균등하게 흐른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절실하게 느끼고 숙연해지는 시점이 바로 연말이다. 새해에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검증하는 것이 두려워지고 신년운세는 어떤지 앞질러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점에 섰다. 그러면서 우물쭈물 또 그 시간 속에 묻힌다.　 올 한해는 어떠했는지 묻지 말자.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 김훈은 자신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고 썼다. 지나간 일은 닥쳐올 무형의 미래 앞에 철저하게 무력해지면서 무효가 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모르지만 되돌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는 삶은 발전이 없다고 하지만 반성만 하고 그 반성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무능하다. 지나간 억겁의 시간은 다가올 한 조각의 찰나 앞에서 무효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못나고 부끄러운 행적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부끄러움 한 자락 가지지 않은 이들이 없다. 곱씹으면서 자책한다면 단 한발도 나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잊자. 다만 이 고통스러운 자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가올 시간에는 강단 있게 살아가야 한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무심코 흐르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달력을 만들고 시계도 만들었다. 시간의 흐름에 무방비로 노출된 자신을 단속하고 주어진 시간을 유의미하게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결과가 현재의 우리다. 현재는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과거의 산물이다. 우주의 빅뱅에서부터 지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거창한 말을 늘여놓지 않더라도 그 무지막지 긴 시간 속에 우리가 소유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다. 그 허무한 시간의 파편을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대비일 뿐이다.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 둔 단락에 의해 시간의 한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이다. 만일 이 무형의 매듭에 `새해`라는 시작점이 없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지 상상해 보라. 지나간 모든 시간이 무의미했다 하더라도 다가올 시간에 대한 야무진 대비를 한다면 그리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병속에 담아두고 사랑하는 이와 영원을 함께하고 싶다는 공상에 젖어있는 순간 가둬둘 수 없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