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아내가 꺾어 꽂은 갈대에서 부슬부슬 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남편은 당장에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내가 다그친다면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을 맞으면서 온 식구가 돌림병처럼 감기를 앓고, 집안 분위기가 침울한데 아내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알레르기 증세가 있는 남편은 연신 기침을 하며 먼지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허연 갈댓잎을 쓸었다. 마음을 다스리려야 했다. 　 아내는 갱년기에 들면서 말수가 줄고 즐겁게 하던 가사와 살갑던 남편 내조에 등한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들 만큼 피폐해져서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을 한 아내가 갈대를 한 아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남편은 오랜만에 발갛게 상기된 아내의 얼굴을 보고 기뻐했다. 아내는 도자기 항아리에 갈대를 꽂으려다 말고 아카시아 꿀을 담았던 키 작은 유리병에 갈대를 꽂았다. 갈대 밑줄기를 잘라버리면 높이가 맞을 텐데 자꾸 넘어지려는 갈대를 꽂는 아내에게 남편이 밑동을 자르라고 충고했다. 아내는 갈대가 어떤 힘으로 살아가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하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아내는 오래전부터 그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여자의 마음`이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이리저리로 날리는…. 　 `청춘을 돌려다오`를 부르는 가수의 음반을 살망정 오페라나 클래식에 관심이 없던 남편도 `여자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아내가 누누이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리골레토`는 원래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희곡 `왕의 환락`을 베르디가 오페라로 바꾼 작품이다. 권력자의 부도덕성과 횡포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보니 공연을 금지 당했다. 권력의 검열 때문에 프랑스 궁정의 배경을 이탈리아로 바꾸었다. 주인공을 대가 끊어진 영락한 만토바 공작으로, `저주`라는 처음의 오페라 제목을 주인공 이름인 `리골레토`로 바꿔 검열을 피했다. 이런 까닭으로 베르디의 오페라는 위고의 원작만큼 사회비판 의식이 절절하지 못하다는 평이다. 　 어떻게 해서 리골레토에게 저주의 운명이 내려졌을까.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에게 딸을 농락당한 몬테로네 백작이 공작에게 덤벼들다 끌려나갈 때 만토바의 총신인 어릿광대 리골레토가 백작을 조소한 것이 운명의 씨앗이 되었다. 리골레토는 자신이 섬기는 공작에게 의무적인 아첨을 한 것일까. 백작은 너도 아버지의 분노를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며 리골레토를 저주한다. 결국 딸 질다도 만토바 공작에게 농락당하고 리골레트는 자객을 시켜 공작을 죽일 음모를 꾸미지만, 질다는 사랑하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자객의 칼에 대신 뛰어든다. 리골레토는 공작의 시체가 딸 질다의 시체인 줄 알게 되고 저주가 실현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이런 결말로 위고의 사회비판의 의도가 흐려져 버린 점은 그 시대가 얼마나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사회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남편은 아내처럼 만토바 공작이 불렀던 `여자의 마음`을 흥얼거려보았다. 떨어진 갈대 잎 부스러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와서도 오랫동안 갈대를 들여다봤다. 이리저리로 흔들리는 여자의 마음이라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리골레토의 딸 질다를 생각하니, 갈대와 여자의 마음이 아이러니하다. 　 갈대는 바닷바람이나 강바람이 몰아치는 물가, 질퍽한 땅에 산다. 질퍽한 땅은 모든 것을 썩힌다. 그런 곳에서 속을 채우지 못하고 자란 연약한 줄기이기에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바람에 꺾이지는 않는다. 삶의 유연성을 보여주지 않는가? 마치 바람에 순종하듯이 이리저리로 몸을 맡기는 유연함,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불같은 성정에 맞서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는 자신의 아내 같다고 남편은 생각했다. 그 유연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원통형으로 생긴 엽초라는 것이 속이 빈 줄기를 감싸주어, 흔들리되 꺾이지 않게 단단히 붙들어준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엽초였다. 아내는 그 엽초를 보려고 투명한 유리병을 선택한 것이다. 연약한 갈대를 하찮게 보지 말라. 질퍽한 땅에서 썩지 않기 위해 갈대가 스스로 만들어낸 규소라는 성분은 역경 속에 주저앉기를 거부하는 삶의 의지이다. 그것은 최후의 순간, 품었던 비수로 일격을 가하는 아내의 자존심 같은 것이기도 하고, 리골레토의 딸 질다가 목숨 던진 사랑의 힘이기도 하다. 남편의 눈길이 바스러져 가는 갈대에서 떠나지 않는다. 갈대가 질다로, 세상의 아내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