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아 비켜라 용기있게 내가 간다. 　  -니체　 즉석요리 생방송처럼 그냥 부딪쳐 보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용지에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뻐근한 목을 서너 번 돌리고 나자 알람이 울렸다. 그는 책상 앞에 붙은 일정표를 들여다봤다. 6시에는 30분간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규칙을 깨고 운동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는 창고에서 사다리를 꺼내 어깨에 둘러멨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가 문제의 벚나무 가로수 앞에 도착했을 때 녀석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119 불러 병원에 데려갔대요. 연락할 때까지 절대 나타나지 말래요."　 "아니야, 가봐야 해. 일이 더 꼬이면 곤란해. 진실은 겁내지 않아. 너 아직도 맨발이구나. 일단 우리 집에 가서 씻고 이따 나랑 병원에 가보자."　 "고맙습니다, 선생님. 늘 걱정을 끼쳐서. 근데 사다리는 왜요?"　 "저 나무에 올라가려고. 저기 봐. 찢어진 비닐이 깃발처럼 펄럭거리잖아."　 "흉하네요. 에이, 우듬지까지 오르려면 그 사다리로는 어림도 없어요. 선생님보다 제가 올라가는 게 낫겠어요."　 사다리 높이는 나무에 비하면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가로수의 높이는 대단치 않아 보였기에 그는 녀석이 나무에 오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 녀석에게 신겼다. 　 녀석이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 나무둥치를 온몸으로 안은 녀석은 조금 오르다 미끄러져 내려오고 다시 두 발을 모아 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고 녀석에게 사다리에서 내려오라 했지만 녀석은 나무둥치를 붙잡은 채 심호흡했다. 하나, 둘, 셋, 기합을 넣고는 원숭이처럼 기어올랐다. 가지 하나를 가까스로 붙잡고는 안간힘을 써서 우듬지 가까이 다다랐다. 가지에 올라타고 앉아 비닐을 떼기 시작했다. 잡아 뜯은 검은 비닐 조각이 흐느적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는 마음이 놓였다. 내려올 때는 미끄럼 타듯 내려오면 될 듯했다. 녀석이 마지막 남은, 갈퀴 같은 기다란 비닐을 잡아당겼다. 우지끈! 가지가 부러지며 나무가 녀석을 떨쳐냈다. 가속이 붙은 녀석의 몸이 팔을 벌리고 선 그를 강타했다. 그는 쓰러진 순간, 박수갈채를 받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전경에게 끌려가는 시위대 친구들을 숨어서 보고 있는 자신의 웅크린 등과 자신을 떠난 연인의 차가운 표정을 보았다. 그 영상들은 회오리처럼 바람의 중심으로 모여들어 한데 섞이고 형체 없이 뭉그러지더니 회오리의 눈에서 폭죽이 터져 나왔다. 아까 녀석이 떼어낸 검은 비닐 조각이 허공에 너울거렸고 그것은 눈부신 빛의 다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빛의 동공 속으로 한없이 흘러 들어갔다. 팽팽하던 의식의 줄이 끊어져 느슨해졌다. 그는 힘이 빠지고 나른해져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아내가 늘 노래를 불렀던 휴식이 이런 거구나, 오래오래 이렇게 편안히 쉬고 싶다, 아니 쉴 수 있겠구나, 생각하는데 선생님! 선생님!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로 맨발로 도망쳐 나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떨었던 그 녀석이고, 그는 나의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하나의 하찮은 사물에 집요하게 사로잡힌 우연도 종국에는 필연이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질주한 삶이 필연이었듯, 세상의 경쟁에서 밀려난 아버지가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집착한 술도, 부러진 목뼈도, 필연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정당방위로 민 것은 우연이었지만, 열아홉의 나이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아버지 대신 책임지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선생님과 어깨의 인대가 끊어진 나는 같은 병실에서 지냈는데, 이즈음 선생님이 말기 폐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우연과 필연의 실로 짠 거미줄이다. 거미줄이 무에 그리 아름다울까. 거미줄에 맺힌 빛나는 새벽이슬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새벽이슬이 해가 뜨면 사라진다는 것을 새벽에는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질주하는 당신을 쉬게 해 주셨다며 미소를 지으시던 선생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