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는 우연이 없다. 인간은 어떤 운명을 만나기 전에 벌써 제 스스로 그것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T.W. 윌슨 그는 출근길의 삼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공중전화 부스를 일별했다. 그곳은 아버지의 폭력에서 도망쳐 나온 반 학생이 추위에 떨며 새벽을 기다리는 피난처였다. 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깊은 한숨을 토한 그는 하늘을 바라봤다. 공중전화 옆에 우람하게 치솟은 가로수에 걸린 검정 비닐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이 강렬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 비닐은 아마도 아파트 주변에 열린 장날, 난전에서 날아오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나 파를 넣었을 것 같은 검은색의 대형 비닐이었다. 가로수의 나뭇가지가 커다란 비닐 모자를 덮어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어서 그는 피식 웃었다. 며칠 후 봤을 때 그것은 나뭇가지에 그대로 씌워져 있었다. 마음에 번민이 일어난 것은 비닐이 낱낱이 찢어지기 시작하면서였다.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너덜너덜한 채로 매달려 펄럭거리는 것을 보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다. 땅에서부터 그 높은 곳까지 어떻게 기어올라 왔는지…. 어떻게 날아왔든지 간에 비닐은 처참할 정도로 찢겨있었다. 그 순간 ‘갈가리 찢긴 조국의 사지’라는 어떤 시가 떠올랐는데 그 연상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청년시절을 뒤돌아보게 했다. 친구와 선후배가 전경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숨어서 지켜본 그는 삼십 년 동안 떳떳하지 못한 양심에 끌려 다녔다. 그들의 이마에 두른 붉은 머리띠는 자랑스럽게 휘날렸지만, 자신의 가슴에는 비겁한 자의 자존심이 찢어지고 있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루는 유난히도 자기혐오와 함께 애석한 감정이 밀려와, 열병한 가로수의 그 저주스러운 벚꽃의 상징과 거기 매달린 검정 비닐의 섬뜩함에 몸을 떨며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사실 그는 벚꽃이 군국주의에 바친 무수한 생명 같아서, 또는 자신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강화시키는 것 같아서, 분분히 흩날리는 낙화의 아름다움을 애써 외면해 왔다. 지역마다 열리는 벚꽃 축제와 거리의 향연에도 시큰둥했다. 무궁화가 아니고 왜 하필 벚꽃이냐는 거였다. 그는 날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면서 저것을 떼어내야지, 떼어내야지, 되뇌었다. 잎을 떨군 가지에 흉물스럽게 걸린 검정 비닐이 요사스럽게 낄낄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인간이 안간힘을 쓰고 필사적으로 가지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어느 날은 벚꽃나무에 딱 달라붙은 그것이 시대에 아첨한 배반자로 상상되어서 마음에 먹구름이 끼어들었다. 저항 정신이 결여된 나약한 현실주의자인 자신으로서는 더욱 자괴감이 들더라고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오늘은! 아직도? 아니 요것 봐라, 이렇게 꽃샘바람이 불어도 아직! 하며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우듬지 가까이 올라가 가지를 휘감은 비닐을 떼어낼 날을 차일피일 미루며 기다리고 있었다. 교사 연수 담당자인 그는 내일 있을 강의 준비를 하느라 밤늦게 학교 연구실에서 나왔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또 그 나무 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다짐했다. 내일은 저것을 꼭 떼어내야지. 블로그를 마지막 점검한 시간이 1시, 장기결석 학생의 비밀 댓글에 해결책 없는 답변을 달고 눈을 붙인 지 두 시간 만에 잠을 깬 그는 화들짝 놀라 이불을 젖혔다. 옅은 잠을 자는 내내 강단에서 횡설수설 떠드는 꿈을 꾸다 깨어난 것이다. 알람은 다섯 시에 맞춰 있었지만 곤두선 신경이 그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오후에 있을 전달 연수의 강의 준비가 아무래도 미흡한 탓이었다. 그는 역사 수업 외에 창의교육 개발 연구부서의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상부 교육기관에서 받은 연수 내용을 교사들에게 전달했다. 그 일이 자신의 자존감을 상승시키기는 했지만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