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인지….`  그녀가 감싸 안은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냈다. "다란아!" 가볍게 등을 때리는 연두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린 회화나무 벤치에 앉았지. "봄 빛깔이 참 좋아. 너 아직도 연둣빛이 싫으니?" 심리적 상태에 따라 다른 것 같다고 그때는 말을 바꿨지. "다란아. 나 캐나다에 이민 가. 이제 못 볼지 몰라.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나는 연두의 `할 말`을 짐작했고,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폐관 10분 전 알람이 울렸어. 내가 급히 일어나 가방을 챙겨 오겠다니 연두가 따라왔지. 벤치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 연두가 굳이 따라오니 편치 않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머릿속에서는 거미 한 마리가 줄을 치고, 눈앞에는 얼룩진 꽃잎이 분분히 날고 있었지. 할 말이 뭐겠어? 불안했어. 갑자기 요의를 참을 수 없어 화장실로 달려갔지, 들어가자마자 요의는 사라졌지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좀 더 기다려달라고 해야 하나.`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사람의 마음이란 상대방이 굴욕적인 사죄를 했을 때야 비로소 만족하게 돼. 머리를 주억거리며 완전한 굴복을 할 때 비로소 연민이 생기고 상대에게 우호적으로 변하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그녀의 어릴 적 상처 때문이었다. 지갑의 돈을 훔쳤다고 번번이 누명을 씌운 어머니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그녀는 근 이십 년 동안 어머니를 끈질기게 고문했다. "마, 됐다. 마, 됐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의 미안함이 함축된 사과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더 길고 진실한 사죄의 말을 듣고 싶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의. `엄마가 잘못했다. 미안하구나. 이제 너도 잊어버리고 나를 용서해다오.` 그녀 역시 연두에게 완전한 굴복의, 확실한 사죄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녀가 화장실 거울 앞에서 상념에 젖은 짧은 시간 동안, 연두는 그녀의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내 제 숄더백 속으로 집어넣었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 한 장을 찢어내 긁적이더니 접어서 파우치 속에 넣었을 때,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왔고, 직원들이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둘은 말없이 주차장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었다.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 댔다. 그녀는 아직 하지 않은 연두의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 앞에서 연두가 그녀를 안았다. "다란아, 잘 살아. 얼굴이라도 보고 가니 좀 낫네." "저어… 연두야."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고, 뭔가 말을 해야 한다고 느낀 순간 연두가 차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어. "잘 있어." 황혼빛을 받아 노랗게 물든 연둣빛 나무들의 열병 사이로 차가 미끄러져 갔지. 그림 같은 풍경이었어.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날 즈음 연두의 전화를 받았지, 편지 쪽지를 파우치에 넣어두었다는. 　 ―다란아, 네가 아끼는 거, 내가 가져왔어. 그걸로 빚잔치한 거라 생각하고 예전처럼 당당하게 고개 들고 다녀. 　 그녀가 기내 가방을 끌고 공항 대합실을 걸어가고 있다. 캐나다 행 여객기가 곧 도착할 것이다. 누군가 보석금을 마련해서 연두를 감옥에서 꺼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그녀는 마음에 되뇐다. 연두가 어떤 일에 휘말렸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