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고전 목록 첫 번째 란에 보르헤스의 이름을 주저하지 않고 쓰겠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환상적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극단적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킨 그는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지만, 사후에야 카프카와 필적하는 평을 받았다. …… 모래로 만든 그대의 밧줄…… 조지 허버트 왜 보르헤스는 하나님께로 귀의하여 사제가 된 조지 허버트의 이 시를, 그것도 머리말에 인용했을까. 보르헤스는 늘 작품 속에 보르헤스라는 주인공, 곧 작가 자신을 등장시키는데, `모래의 책`의 줄거리를 잠깐 살펴보자. 보르헤스는 방문객에게 이상한 책 한 권을 소개받는다. 그 책은 첫 페이지도 끝 페이지도 없는 무한한 책이었다. 한 페이지를 보고 덮은 후 그 페이지를 절대 찾을 수 없고, 표지와 어떤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면 페이지 수가 무한히 불어나는 책이었다. "무한히 불어나는, 무한의 수는 그 어떤 수도 받아들일 수 있지요. 만일 공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공간의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도 있지요.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하고 책을 판 사람이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보르헤스는 부아가 치밀어 당신은 장로교인이지요? 하고 물었다. 76세의 나이에 무한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 가당찮았을까.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다. 불면 끝에 그 책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기도 했고, `1983년 8월 25일`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밖에서는 또 다른 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꿈꾸듯 영원한 시간 속에 꿈꾸고(존재하고) 싶은 보르헤스였으니…. 책을 판 사람은 이 책을 보물이지만 악마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보르헤스는 연금과 위클리프 성경을 주고 그 책을 산다. 보물을 도둑맞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책이 정말 무한한 게 아닐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었는데, 이 대목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이 일찍부터 가진 염세주의적 성향이 더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친구조차 만나주지 않으며 그 책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 책은 기괴스러웠고 그것을 열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는 자신 또한 기괴스럽게 여겨졌다. 그 책은 악몽의 물체였고,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깨닫는다. 그는 책을 불태우려다 무한한 책의 소각은 똑같이 무한한 시간이 걸려 지구를 연기로 질식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모래처럼 페이지가 불어나는 그 책을 악몽의 물체,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만드는 물건이라니, 작가들이 생각할 여지가 많다. 과연 내 책은 어떠한가? 현실을 손상시키지는 않는가? 인간의 영혼을 썩게 하지는 않는가? 그런 의구심에 빠진 보르헤스의 고심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쓴 책이 독자에게 선한 영향보다 악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을 때, 불어나는 세상의 책은 바로 `모래의 책`처럼 기괴한 요물이 되어버린다. 기괴한 책은 보물이었고 `모래의 책`이었고, 바로 자신과 다른 작가들이 쓴 책이었고, 악몽의 물체였고, 현실을 손상시키고 썩게 하는 물건이라고, 고백하는 듯하다. 태워버리려 해도 무한한 시간이 걸려 연기로 지구를 질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보르헤스의 염세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차라리 `모래의 책`을 잃어버리고 싶다. 소중한 보물 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자신의 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책은 영원히 불어나며 푸석거리는 모래처럼 공허한 것이었다. 모래로 만든 그대의 밧줄이라니!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 밧줄이 보르헤스 자신의 밧줄이며 모든 작가의 밧줄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헛되고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라고 성경의 전도자는 탄식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인생의 모래 구덩이에 빠지며 저 불가능한 모래 세계를 파고 또 파며 더 깊게 들어가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들고, 한 손에는 모래의 책을 들고 헛되도다! 하면서도 이것이 모래의 책이 될지라도 심령으로 낙을 구하는 일이 글쓰기라고 하며 모래의 책을 만들어내는 작가들, 아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심정을 느끼지 않을까. 보르헤스도 하나님에게 받은 분복대로 즐거워하며 책을 지었으니, 모래의 책을 불 속에 넣지 못한다. 모래의 책을 스스로 잃어버리려고 자신이 오랫동안 근무한 도서관 서가에 꽂아두고 두 번 다시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보면 괴테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파우스트의 결말 부분, 그도 결국 신에게 귀의한다. 괴테의 나이 82세였다. 보르헤스 역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장 속에 조용히, 그리고 모호하게 생의 허무를 녹여낸 게 아닐까. 어쩌면 아직도 허무한 꿈을 꾸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