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정신적 위기를 맞은 어느 문학 박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퇴직을 이삼 년 앞둔 그는 출간 준비를 해왔는데, 미완의 상태에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집중력과 기억력도 현저히 떨어져 학자로서의 생명이 다했다는 극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봤다. 가뭄의 농부가 비를 기다리듯 노쇠한 육체를 적셔줄 영혼의 단비를 갈망하고 있는데, 때마침 번개가 어둠을 가르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빗물이 내리막 골목길을 개울물처럼 흘러내려갔다. 비가 그의 상념을 청년 시절로 데려갔다. 그에게도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같은 시간이 있었다. 언제나 희망찬 아침을 시작했고 자신감이 넘쳤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발푸르기스의 밤을 누비는 파우스트와 다를 바 없이 절박했다. 그가 파우스트와 다른 점은 영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영혼 중에도 꿈꾸는 영혼을 살 수 있다면 늙고 병약한 육체가 주는 절망을 이길 수 있을 듯했다. 꿈꾸는 영혼이라면 환상소설의 대가 보르헤스가 있다. 그는 단편 `타자(他者)`를 떠올리며 보르헤스의 꿈을 더듬어갔다. 강의 준비를 잘해갔는데 한 명의 학생도 수업에 나타나지 않은 날,-지금 흘러가는 빗물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은 그처럼-보르헤스는 얼음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찰스 강을 바라보다 20대의 보르헤스를 만난다. 70세에 이른 보르헤스는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과거이고 미래인, 동일한 보르헤스라는 사실을 깨닫고 젊은 보르헤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둘은 서로가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네." 그는 이 말에 낙담했다. 과연, 젊은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인 지금의 나를 꿈꾼다는 것이 가당할까. 모든 능력이 쇠퇴한 무기력한 노년의 나를…. 그러나 보르헤스의 다음 말이 심상했다. "아마 우리는 이미 꿈을 꾸기를 멈췄는지도,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숨을 쉬는 것을 받아들이듯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며 보르헤스는 자신이 70년 동안이나 계속 꿈꾸어 왔고, 자기 자신과 맞부딪혀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보르헤스의 할머니가 임종 때 했던 말이 마음에 닿았다. "나는 천천히 죽어가는 아주 늙은 노파야. 누구도 모두가 겪는 이 자연스러운 사건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게야." 그는 이 지극히 평범한 말에 위로받았다. 게다가 `자네는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기쁨을 자네에게 줄 시를 쓸 거`라고 젊은이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눈이 환해지는 착각을 일으켰다. 독자 없는 자신의 저서에 격려를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력은 어떤가요?` 묻는 젊은 보르헤스의 말이 가슴에 비수를 들이댔다. 채 스물이 되지 못한 청년에게 70이 넘은 사람이란 시체와 같은 존재라니, 60이 넘은 나 역시 시체와 같은 존재인가… 아니, 낙심하기에는 이르다. 위대한 보르헤스도 자주 심한 망각에 빠져들곤 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그 나이에 고대 영어를 공부하고 있고 그 반에서 꼴등을 하고 있지는 않다니….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두 보르헤스는 견해가 부딪친다. 너무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서로를 속일 수가 없기 때문에 대화가 쉽지 않았다. 무엇을 충고하거나 토론을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늙은 보르헤스는 젊은 보르헤스가 미래의 보르헤스인 자신을 꿈꾸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안의 타자를 느낀다. 꿈꾸는 자신도 타자였다. 자신이 꿈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슬퍼지는 그-그도 지금의 자신이 꿈꿀 만한가? 젊은 보르헤스가 꿈꾼 것은 기적이나 불가능이었다. 그것은 70세에 이른 보르헤스가 젊은 시절 꿈꾸었던 도저한 문학적 업적의 갈망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보르헤스는 젊은 보르헤스를 바라보며 자신의 현실을 응시한다. 그도 보르헤스의 말을 되뇌며 용기를 얻는다. "그래, 내 나이에 이르면 사람들은 거의 시력을 잃게 되지. 눈앞에 노란 빛깔과 그림자들과 빛들이 어른거리게 돼.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 점진적인 시력 상실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니까. 그것은 마치 천천히 여름밤이 오는 것과도 같지." 고대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보르헤스처럼 그도 꿈을 꾸려고 눈을 감는다. 이제는 불가능하고 기적 같은 꿈이 아니어도 좋을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