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볕이 매우 따갑다. 논두렁길을 따라 한참 걷다보니 등에 땀이 흐르고 심한 갈증이 느껴진다. 그런데 더위 때문에 갑자기 머리속의 시냅스(synapse)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는지, 정말 오랫동안 머리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참담했던 육이오 한국전쟁 통에 걸음마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포화속의 피난길에서 죽지 않고 살은 것도 기적일 수 있겠지만, 내 어린 날의 기억은 전후 폐허더미 속에서 꿈틀거리며 하루하루 끼니를 굶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뭇 사람들의 처참한 삶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내가 태어난 바닷가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대략 계산해 보아도 육 키로 이상은 족히 되었을 것 같다. 요즘같으면 현수막 만드는 데나 쓸 것 같은 천을 검게 염색한 교복에다, 땅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그 먼 거리를 매일 도보로 등하교해야 했었는데, 차라리 조금 쌀쌀한 날씨에는 그나마 걷기가 낳은 편이었지만, 볕이 따가워 지는 늦은 봄부터 여름 방학 때까지의 등하교는 매일 땀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고행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그날 하교길도 아마 초여름이었을 것 같은데, 산골짜기에 있는 학교에서 출발하여 도심을 거의 통과하고, 다시 내가 살던 농촌 입구에 들어서는 길목에 접어들 무렵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요즘 그 흔한 플라스틱 텀블러 같은 것도 하나 없어, 더운 날 먼 거리를 하교도중 아무리 목이 타도 마실 물은 없었다. 땀은 비오듯하고, 목은 타들어 가는데, 바로 눈앞에 냉차를 파는 리어커가 한 대 서 있는 게 아닌가? 나이 좀 드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자동차가 거의 없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웬만한 거리 이동은 모두 두 발에 의지해야 했었고, 따라서 마라톤 코스 중간 중간에 생수 공급 포인터가 마련되어 있듯이, 그 때는 길 거리 요소요소에 냉차를 파는 리어커들이 대목을 보던 시절이었다. 특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 냉차 리어커는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는데, 얼음물에 사카린 따위로 단맛을 가미하고, 또 잘 익은 수박을 반으로 쪼개 잘 보이게 담궈둠으로써 시각적인 효과까지 극대화시켜 행인들의 갈증을 더욱 자극하도록 연출해 놓은 냉차 리어커의 유혹, 그렇다고 그것마저 아무나 사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절대 아니었다. 고추장 비빔밥 점심 도시락을 짜게 먹은 데다, 그날따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도랑물이라도 마시고 싶을 정도로 목안이 타고 있었는데, 눈앞에 수박과 얼음이 둥둥 떠 있는 투명한 냉차 유리통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느냐고? 그러나 내 호주머니 속에는 1환 짜리(화폐개혁 이전에는 `원`이 아니고 `환` 이었음) 동전 한 개도 없었으니, 그 냉차는 그림의 떡 정도가 아니라 목마른 행인에 대한 고문이 아닌가? 나는 냉차통을 멀거니 쳐다보며 타들어가는 목구녕으로 눈물을 삼키고, 빨리 집에 도착하여 우물물이라도 실컷 마셔야겠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하느님께서 혹은 부처님일지도 모르지만, 목마른 어린 생명이 너무 불쌍했던 것일까? 약 백여미터 정도 냉차 리어커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눈 앞 길바닥에 붉은 빛이 영롱한 무언가가 시야에 포착된 것이다. 엉급결에 집어들고 보니, 바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십 환짜리 동전이 아닌가. 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나는듯이 발걸음을 돌려 냉차 리어커로 뛰어가서 의기양양하게 방금 습득한 동전을 내밀고, 냉차 한 잔을 얻어 마셨는데, 그 때 그 기억이 왜 오늘 갑자기 떠올랐을까? `진실로 구하면 얻으리니…` 마눌님과 간혹 산책길이라도 나서면 뒤에 따라오면서 하는 마눌님의 잔소리 `자세 좀 펴욧! 왜 영감처럼 꾸부정한 폼으로 맨날 땅을 보면서 걷는지 몰라?` 그래서 나의 대답은 "그 참, 혹시 땅에 오백원짜리 동전이라도 떨어져 있을지 누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