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書誌) 주변에서 선현들의 정수(精髓)기사를 수재상고(蒐材詳考)하다 보면 문장수식의 구사가 아니라 사리의 정확성과 정치(情致)의 심원력에 문득문득 매혹되어 그 장중미를 맛보기도 하고, 내 세운 논리의 정연함과 합당한 이치에 무릎을 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문전지적(文典誌籍)의 부족한 섭렵을 일깨워 주는 대목에는 분발의 촉매에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여기서 얻은 것은 기록문화로 인한 `세계문명사적 발전에는 꼭 사람을 위주로 하는 인문학적 기본 소양이 있어 가능했고, 이것이 인류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치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생활에 뿌리 박혀있는 인간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선비들이 숭상하는 정신적 가치는 `기개(氣槪)에 지조(志操)이고, 첫째 덕목으로 중시되는 것은 `의(義)`이다. 인, 덕, 선 등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최근에는 `명미당초휘(明美堂草彙)`를 읽다가 `고령탄(高靈歎)`이란 대목에서 멈칫하다가 정신 차려 살펴보니, 선비정신과 절의의 진수(眞髓)가 무엇인지를 오늘날에 사는 아류(亞流)에게 퍼붓는 질타를 폐부로 느끼게 한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채찍질을 마구 퍼부을 것만 같다. 　이 글의 뜻과 시대적 배경은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계유정난)과 사육신 및 단종의 죽음에 이르는 신숙주(보한재·保閑齋)의 곡학아세로, 권력에 붙좇음을 `고령탄`의 이름으로 탄식조 음률로 읊은 것이다. 　당시 사회상 묘사는 공포 분위기 속에 살육 도살이 횡행한 칼바람에 맞서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음으로 불의에 항거한 선비정신과, 이와 반대로 권모술수에 빠져 일신의 영달만을 위한 배은 망덕자의 죽음 문턱에서 과거의 죄악을 뉘우쳐 빌고, 그 죄업을 용서 받고자 괴로워하고 번뇌하는 궁상떠는 인간상을 그린 것이다. 　`고령탄`의 작자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문신·학자로서 자는 봉조(鳳朝), 호를 명미당(明美堂) 또는 영재(寧齋)라 하고, 강화인으로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한 1만5151명 중 최연소 합격자로 만 13세인 1866년에 합격했다. (최고령자는 만 85세로 1890년에 급제한 정순교였다.) 명미당은 충청우도와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낸 바 있고, 한 때는 평북 벽동에 유배되기도 했으며, 해주관찰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는 `당의통략`과 `명미당고` 등이 있고, 그의 조부 이시원(李是遠)은 1815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865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나이가 많아 사퇴했다. 강화에서 병인양요(1866년)로 성이 함락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순절했다. 　이건창은 황현(黃玹·매천)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공론하며 지냈다. 그리고 당시 이 두 사람은 조선 지식인의 담론의 공간을 압도했다. 어느 날 명미당(이건창)의 부음을 접한 매천(황현)은 그의 만사(輓詞)에 "가을 등불 아래 대성통곡하고, 미쳐 기절 할듯하니, 칼을 뽑아 갑중의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다"라고 썼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백아(伯牙·춘추시대의 유명한 고금가(鼓琴家)가 거문고로 타는 아양곡(峨洋曲)은 종자기(鍾子期)만이 알아주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의 여섯 개 줄을 칼로 잘라 버렸다는 것에서 `백아절현(絶絃)`은 참다운 벗의 죽음을 이르는 말로 4자 성어가 이루어졌다. 　정말 소리꾼의 노래는 3일 동안 무대 위의 대들보에 맴돈다는 `여음요량(餘音繞梁)`의 고사가 있고, 공자가 소악(韶樂)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거문고의 고수 백아와 그 음에 공명(共鳴)했던 종자기도 지음(知音)으로 통했고, 백아가 거문고로 자연을 노래하면 종자기는 "우뚝한 산과 도도히 흘러내리는 물을 느낀다" 고 소리와 그 울림으로 통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의기로 뭉쳐 있는 명미당과 대쪽 같은 기개의 매천과의 의기 상통함을 알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