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좋은 소설을 쓰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였던 후배는 살길이 막막했는데 틈틈이 소설을 쓰며 생계를 꾸릴 전망 있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매출이 늘어 행복한 비명을 지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폐업을 선언했다. 삶도 중요하다며 즐기면서 소설을 쓰라고 추궁하자 후배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들먹이며 자신의 존재 방식을 옹호했다. "돈이 눈에 보이면 영영 소설을 놓아버릴 것 같아서요, 그게 두려워요" 깍지 낀 엄지로 볼을 꾹 누르며 나를 바라보는 후배의 눈망울이 어두운 숲에서 메애, 우는 염소 같았다. 　지금 나는 그가 장황하게 언급한 제임스 조이스의 그 책을 손에 들고 있다. 어쩐지 주인공 스티븐을 닮은 것 같은 후배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다. 그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선배는 참, 즐기면서 어떻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어요. 예술가의 영혼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그 소설 읽으셨지요? 물론이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소설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면서도 매력적인 작품이지요. 사변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예술가의 영혼`이 네가 폐업한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심기를 건드렸다. 　관계가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이게 자전적 소설이니 스티븐의 생각이 제임스 조이스의 생각이고, 그건 바로 내 생각이거든요. 오호, 그러니까 네가 제임스 조이스라도 된단 말이지? 내가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스티븐의 영혼을 예술적 영혼 운운하지만, 사실 애타심 없는 개인주의자 아닌가?" 후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선배가 그런 시각으로 문학 작품을 읽었다니! 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아슴아슴한 내 기억을 돕기 위해 줄거리를 간추려주었다. 　스티븐 디덜러스는 어린 시절 학감에게 부당하게 매를 맞고 교장에게 사정을 밝힌다. 거부와 반항적인 자세의 시작이었다. 크리스마스 만찬일, 아일랜드 민족정신의 뿌리인 카톨릭과 영국 통치로부터 독립을 지향하는 정치적 갈망 사이에서 아버지와 친지가 갈등을 빚었다. 정치와 종교 문제는 늘 그렇듯 만찬을 싸움터로 만들었고, 그런 현실은 그가 예술적 세계에서 버리거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파산하자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지내다 여인 에머 클러리를 만난다. 다시 학교에 들어간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신앙심이 깊어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이단의 요소가 싹트고 있었다. 19세기 전형적인 반항아였던 바이런을 최고의 시인이라고 주장했다가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고, 작문으로 받은 상금으로 사창가에서 순결을 잃는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고민하다 지옥과 죄인의 심판에 대한 신부의 설교에 충격을 받고 죄를 고백한다. 대학에 들어가 성직자의 추천을 받지만 한 때, 신부를 꿈꾸었던 그는 세상의 함정에 빠져 영혼의 타락까지 마다하지 않고 삶을 배워보리라 마음먹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예술가로 입신하고자 하는 갈망의 첫걸음이었다. 스티븐 디덜러스의 `디덜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 명장(名匠)의 영어이다. 그도 다이달로스처럼 영혼의 자유와 힘으로, 살아 있는 것과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고 마음먹는다. 그후 개울에 서 있는 낯선 소녀의 헐벗은 다리를 보고 학의 다리를 연상하며 자신의 비둘기 가슴을 생각한다. 그에게 종교와 가정과 국가는 독수리였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새를 지배하며 위협했다. 그의 영혼은 독수리가 아닌 학 같은 다리를 가진 소녀 앞에서 환희를 느낀다. 바닷가 모래 언덕에서 잠들었을 때 그는 예술을 상징하는 빛(영혼)의 세계를 보게 된다. 　그는 결국 현실을 거부한다. 아일랜드에서는 영혼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물을 뒤집어쓰게 되어 평생 날지 못하며, 조국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하며, 모국어 학습을 거부하고, 대학의 실리적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아일랜드의 정치적 현실과 국제 평화 캠페인을 외면함으로 애타주의를 모르는 개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늘 꿈꿨던 여성 에머 글러리에 대한 애착도 미련 없이 버리며 종교도 어머니의 애정도 거부한다. 　줄거리를 마친 후배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선배,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어 내기 위해 조국을 버리고 자기 유배의 길을 나선다`는 스티븐의 영혼을 이해하겠어요? 나는 되레 반문했다. 그럼 넌 네 영혼의 밭에서 해결할 수 없는 생계의 불안을 벼리어 내기 위해 멀쩡한 사업을 폐업하고 문학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떠난 거니? 예술의 영혼은 이단이야! 나의 거친 말에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영혼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래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씌워 날지 못하게 하면 빠져 나가야겠지요. 스티븐 식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생계라는 그물을 빠져나가 도망치려는 거예요. 자유로운 몸이 되면 이탈리아 생리학자 루이지 갈바니가 말한 그 `심장의 황홀경`에 이르겠지요. 그러면 시들어가는 내 창작의 영혼에도 시인 셸리*가 말한 석탄불이 밝게 피어나겠지요." 　나는 지금 후배가 말한 문장(민음사 326 쪽의 주72)을 읽고 있다. 　* 72)셸리는 `시의 옹호`에서 창작중인 정신은 시들어가는 석탄불 같아서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바람처럼 불면 순간적으로 다시 밝게 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 늦은 밤, 자판을 두드리는 후배의 영혼이 헐벗은 소녀의 다리를 닮았거나 비둘기의 여린 날갯짓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