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를 떠난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한반도를 휩쓰는 새벽이었다.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에 와당탕탕 떨어진 양동이가 철 대문을 들이박고 마당을 굴러다니는 소리에 달봉 씨는 잠을 깼다. 저 무시무시한 바람을 뚫고 새벽 청소를 나가며 살아야 하나. 이순이 지나도록 모아둔 재산은 없지만, 늘그막에 낳은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즐겁게 새벽일을 나가던 달봉 씨가 요즘 들어 부쩍 일을 힘들어했다.  　빌라와 주택이 모여 있는 골목 삼거리, 전봇대 앞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람에 흩어진 스티로폼이며 플라스틱은 그나마 줍기 쉬웠다. 고양이들이 뚫어 헤집어놓은 종량제 봉투를 보면 차에 깔린 유기견의 터진 배가 떠올라 구역이 났다. 주택의 담벼락을 따라가며 바람에 날린 쓰레기가 마치 전쟁터에 뒹구는 팔다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형이 참전했던 월남전이며, 포로가 된 아버지가 도망쳤던 마지막 격전의 6·25 전쟁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쓰레기봉투를 들어 올릴 때마다 사는 것이 전쟁 같았고 자신은 전사자를 치우는 병사 같았다. 아, 솔로몬 왕의 말이 옳구나!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 　하지만 부귀영화를 다 누린 후 얻은 솔로몬 왕의 깨달음이 아닌가. 달봉 씨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모로 돌아누웠다. 방안의 냉기에 코끝이 얼어붙을 듯했다. 그는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전기장판이 데워준 이불 안에서 마냥 자고 싶었다. 이제 그만 자신도 하나님 품에 안긴 아내를 따라가고 싶었다. 　젊은 날에는 일요일에 늦잠을 잤다. 맛있게 먹는 꿈을 꾸며 입맛을 다시면 입술에 가만히 입맞춤하며 잠을 깨워줬던 아내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아내가 남겨주고 간 아들이 아직도 대학을 다니고 있다. 최저임금제로 쫓겨난 후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했다고, 다들 그렇다고, 남 말하듯 얼버무리던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불쌍한 녀석이었다.  　한 번은 아들을 찾아갔더니 하숙도 기숙사도 자취방도 없었다. 산동네 어느 가내공장 작업실에 요를 깔았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이불을 거두어 창고 안에 넣고 학교로 가는 것 같았다. 요가 습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달봉 씨는 아들을 데리고 모텔로 가 함께 목욕했다. 그날로 조그마한 아파트 하나 가지는 게 꿈이 된 달봉 씨는 휴식시간에도 쓰레기 치우는 일을 과 외로 맡았다. 열심히 일했다. 눈을 감을 때까지 일해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아파트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린아이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헛된 인생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래도 좋았다. 새벽일을 나가기가 예전 같진 않지만 자신은 곧 하나님께로 가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기가 푹 죽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바가지의 차가운 물이 얼굴을 끼얹었다. 아찔한 자각,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 일자리를 잃을 절박한 순간이 올 텐데! 　달봉씨는 벌떡 일어났다. 범사에 때가 있다 했으니, 오늘은 붓고 있던 적금을 깨서 아들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가지고 아들에게 가야겠다, 독립적인 인간이 되라고 모른 척 내버려 두었던 아들의 자취방을 구해야겠다, 바람이 불면 지붕이 들썩거리며 양동이가 굴러다녀 잠을 깨우는 집이 아닌 깔끔한 원룸을 얻어줘야겠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때까지 쓸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고, 다운 점프도 하나 사 입히고,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를 실컷 먹여줘야겠다. 인생이 헛되다고 어디 푸념만 하는 전도서일까. 더 깊은 뜻이 있을 것이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달봉 씨는 낙을 누리고 싶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달봉 씨는 밖으로 나갔다. 꽁꽁 얼어붙은 골목길을 걸을 때 어떤 설렘이 가슴속에 일렁거렸다. 입김이 마스크를 쓴 코끝을 데울 때 생각났다. 혼자 사는 동네 할머니가 모아둔 폐지를 팔아주기로 한 날이 오늘이었다. 달봉 씨는 희끗희끗한 쓰레기들이 양쪽 길을 따라 버려진 산복도로를 내려갔다. 윗동네에 공장이 생기고부터 지나가는 차들이 종이컵과 휴지와 페트병, 담뱃갑 같은 것을 던졌다. 그곳에는 CCTV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쌍욕을 하던 달봉 씨의 입에서 천사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할머니의 폐지를 처리하고 와서 쓰레기를 주워야겠다, 후미진 동네까지 시청에서 나와 청소를 해주지는 않으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아들에게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더없이 즐거운 새벽길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비상등을 깜빡이는 쓰레기차가 달봉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