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흐르는 물`(流水)과 같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탈도 많고 말도 많던 무술년 한해도 이젠 저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갈등과 혼돈과 질곡의 시대가 빨리 지나가고, 따듯하고 아름다운 새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기도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아쉬움을 안겨준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은 세밑이 되면 아쉬움을 포함한 묵은 것들을 죄다 떨쳐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맞이하려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기구했겠지만, 그런 기대감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다르지 않다. 현실은 그 어느 때도 기대치에 미치지는 못하므로 언제나 더 나은 세상과 그런 삶을 향한 꿈을 꿔왔으며, 우리의 삶 자체가 어쩌면 그런 꿈꾸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어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건 `둥근 여백`이며, 그 여백은 `쓸쓸함`이라고 했다. 사라지고 새롭게 생성되는 것들 역시 쓸쓸함이라는 비극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나 `둥글음`이라는 단서를 달아놓고 있는 점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움도 어김없이 쓸쓸함에서 자유롭지는 않더라도 `더 나음`, 나아가 `이룸`(성취)이라는 `둥글음에의 소망`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자작시`지나가고 떠나가고` 전문 　　연말이라 몇 해 전에 쓴 시를 인용해 보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느낌과 생각들이 절실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끝없는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의 반복임에도 소멸을 떠올리면 아쉽고 슬프다. 하지만 자연현상도 이 세상도 예외 없이 지나가고 떠나가며, 그 아쉬움과 슬픔은 새로운 생성에 대한 꿈을 향해 열리게 마련이다.  　시간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만 간다. 그 지나간 시간들은 영영 떠나갈 뿐 되돌아오지는 않는다는데 비애(悲哀)가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에 놓인 채 지나가고 떠나가는 것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으며, 이 어쩔 수 없는 비애에 새로운 꿈을 채워 넣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나가고 떠나가는 것들이 안겨주는 비애에다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도 지나가고 떠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혼돈과 질곡의 도가니인가를 겸허하게 되짚어 들여다봐야 한다. 　위도 아래도 한가지겠지만, 특히 위부터 `욕심의 왕궁`을 허물어야 한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 미덕(美德)을 받들어야만 한다. 아래인 우리도 그런 미덕을 받드는 겸허한 평상심(平常心)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낮은 자세로 꿈꿔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희망이 환하고 따뜻한 불꽃으로 둥글게 타오르는 새 시대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