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위투가 내일 필리핀 북부로 상륙할 예정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사이판에 발이 묶인 한국인 여행객이 돌아오고 있지만, 진이에게는 소식이 없었다.  　진이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라가 다니는 카페의 알바로 들어왔는데, 이런저런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 남편을 불륜에 빼앗긴 카페 사장은 이혼한 후 미국에 사는 오빠의 카페를 맡았다. 당시 대학생인 유라를 만났으니 둘은 퍽이나 오랜 지기였다. 유라야, 진이 소식 알아봤니? 사장 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가 걔 보디가드야? 왜 내게 그걸 물어. 유라는 발끈했다. 진이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말이 지나쳤다. 내가 왜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진이 혼자 그 남자를 짝사랑했을 뿐 자살 소동을 일으킬 일도 아니라고 유라가 따져들었다. 　보육원에서 자란 진이는 어릴 적 엄마의 자살로 생긴 트라우마 때문인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다. 진이에게 실연의 상처를 준 남자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시대의 희귀종이었다. 유라도 진이도 이 점에 호감을 느낀 것 같다. 남자에게는 결혼식을 일주일 남겨놓고 약혼녀가 떠나버린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생활에 자신이 없다는 문자를 남겼다고 했다. 십여 년을 약혼녀의 환영을 찾아 카페를 전전하며 과거의 시간 속을 표류하던 남자가 드디어 유라와 결혼을 약속하자, 진이는 또 한 번 자살소동을 일으키고는 여행을 떠났다. 　유라는 인터넷에 뜬 태풍의 눈을 들여다봤다. 강력한 태풍이 불 때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해서 오히려 중심이 고요해진다고 씌어 있었다. 자신 역시 지금은 잠잠히 진이의 행방을 모른 척하고 있지만, 심연 속에서는 변덕스러운 사이클론이 엔진을 가동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이번 태풍은 1998년 10월 말에 발생한 `허리케인 미치`에 비하면 타격이 적은 편이다. 미치 때는 시속 300km의 바람과 10m 높이의 파도로 아메리카 대륙을 강타했고, 5개월 동안 비가 내렸다. 쓰나미가 강철 같은 자신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을 상상한 유라는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결혼 생각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유라도 진이처럼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그럴싸한 식당 하나는 차릴 수 있는 자립금도 모았다. 유라가 박봉에다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는, 그의 순수한 인간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라는 인제 와서 태풍의 눈 속에 들어앉은 듯 번민에 휩싸였다.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지… 이 남자가 진이의 영혼을 살릴 생명수라면… 진이를 위해 이 결혼을 포기했을 때, 달아난 약혼녀의 환영에 시달려온 이 남자가 다시 겪어야 할 고통은…. 진이와 남자는 연약한 인간이라 자신처럼 모질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라는 퀭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둑해진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릴 듯했다. 유라의 새로운 인생에도 시커먼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유라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이 그린 `응시팔황도`를 보면 유라가 처한 마음의 행로가 매를 닮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위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고 서서 목을 빼고 포획물을 살피는 매의 응시, 길게 찢어진 그 눈은 인간보다 4~8배나 멀리 볼 수 있다. 매의 눈은 멀리 볼 수 있는 육식동물과 좌우를 넓게 보는 초식 동물의 장점을 모두 갖췄다. 정면 응시용 황반과 좌우 응시용 황반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멀리도 볼 수 있고, 넓게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라는 매처럼 자신의 생을 명철하게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매는 어두운 곳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비운을 타고났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현실이 눈을 가려 유라 역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결혼을 강행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 유라는 막막한 심정으로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진이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랐고, 연민하지 않을 수 없는 남루한 남자의 유순한 얼굴이 겹쳐졌다. 　그때 사장 언니의 나직한 말이 들려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는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정말 그랬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기적처럼 진이가 들어섰으니! "다녀왔습니다. 유라 언니 결혼 축하해요" 낯선 청년의 손을 잡고 활짝 웃는 진이를 유라는 얼어붙은 듯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사라진 진이의 또 다른 시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