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가 1년에 365개이고, 서산으로 지는 해도 365개이다. 어떤 해는 바다 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며 떠올라, 서산에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며 지지만, 어떤 해는 먹구름에 가려 언제 뜨고, 언제 지는 지도 모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기억력이 퇴화하고 움직임도 둔해지지만, 더욱 명료해지는 하나가 있다. 너는 누구인가? 아직이야 나이타령할 나이는 아니라고 자위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양기가 입으로 올라온다고 하더니, 요즘 말 수가 부쩍 늘어나 노화현상이 의심되고, 그래서 말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일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1년에 비유될 수도 있겠지만, 아침에 떠올라 저녁에 지는 하루해에도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인생은 당년 초 갈대풀과도 같고, 하루살이와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당년 초 식물은 봄에 새싹을 틔우고, 여름에 강한 태양광 아래에서 잔뜩 영양분을 몸속에 비축하지만, 찬 서리 내리는 계절이 오면, 비축된 영양분도 아무런 소용없이 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하루살이도 아침에 힘차게 날아올라 해질녘에 마지막 비행을 하고, 밤이 되면 모두 땅으로 그들의 삶을 반납한다.  　그런데 그들에겐 1년이 길고 짧거나 하루가 길고 짧음이 없으며, 또 그들의 생(生)과 사(死)에 아무런 의문이 없다. 태어남과 죽음은 자연의 순환과정일 뿐, 의문을 가져야 할 아무런 숙제가 없으며,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질문할 대상이 없음을 아는 것이라 결론 지워 진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에 뜨는 해가 스스로의 의지로 뜨는 것도 아니며 또 스스로의 의지로 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삶은 순환하는 자연현상의 일부일 뿐, 어느 누구의 의지와도 상관이 없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기상하면 되는 것이고, 내일 저녁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면 될 것인데, 혹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기우(杞憂)가 아닐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스스로가 깨어나지 못했음을 알 도리가 없으니, 그것은 마치 내일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밤잠을 설치는 어리석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는 항상 미래 얘기를 좋아하고, 미래가 궁금하여 오래 살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내일 걱정 때문에 오늘이 불행하다. 그러니까 그 내일은 영원히 앞서가기만 할 것인데, 내일을 위해 오늘의 불행을 감수하고자하면, 결코 내일에 이르지 못한 채, 불행한 일생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일을 위해 오늘의 불행을 감수할 것이 아니라, 내일은 잊고 오늘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늘 오늘의 행복이 이어지게 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늘 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면 그 과정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 다음 지키기는 또 여간 힘들었을까? 아무것도 이루지 않음이 다 이룸이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이 다 가짐이라 해도,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입으로만 올라가는 노인의 양기를 좀 아래로 끌어내리기 위해 지금 부질없이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내일 아침에도 틀림없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며, 날이 맑아 해가 보이든, 날이 흐려 해가 보이지 않든 그 해는 하늘에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나는 나의 예언이 분명히 적중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모든 이들이 다 당연한 것을 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