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란 꼭 개인에게만 있거나 개인 차원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의리도 마찬가지이다. 조직에도 정과 의리가 있다.  　물론 이것들도 개인이라는 조직인들에 의해 현실 조직에 투영되어 형성되는 것이긴 하다. 그리하여 유한한 구성원들이 영원한 조직에 뿌려 키우는 하나의 `조직 문화`로 정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도 그 정을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 조직은 `쓸모` 있는 개인을 사랑하며, 이 쓸모는 주로 그 조직에 대한 기여와 실적 그리고 가능성을 통해 평가된다.  　그러나 이 또한 실제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기적(利己的)인 구성원도 조직의 `정`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 삼십 오년 전쯤 공직에 입직(入職)하기 전에 한 민간 조직의 `정`을 잠시나마 듬뿍 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 조직은 누구나 아는 L그룹의 D사이다. 　그룹 대졸 공채 사원으로 채용되어 D사에 배치되었고 보직은 회사의 살림과 인사 등 지원업무를 담당하는 총무과에 보임되었다. 　신년 정초 찬바람 속에 입사하면서 동기들과는 서너 달만 다니다가 그만 둘 거라고 쑥덕대며 회사에 다녔다. 당시 취업 풍경은 이처럼 초기 직장 탐색을 하는 이기적인 신입사원들이 많았고 기업들도 이를 고려해 모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보다는 조직 내 선배·동료들과 인간적으로 친해졌고 봄·여름 가는 조직생활에 빠져 지내다보니 어느 듯 7월이 되었다.  　빈번히 허드렛일까지 하면서도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하는 젊은 날의 직장생활을 정말 재미있게 보냈다. 　국가고시 시험 날짜가 다가오자 한 번은 더 붙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생은 재미있게 사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 즐거운 회사 조직에 평생을 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일주일 정도 갈등하다가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총무과장에게 힘들게 얘기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 경북 동남쪽의 심산 산사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그해 10월 초에 시험을 쳤다. 　시험을 마치고 늦잠 자며 며칠을 쉬던 중 회사의 모시던 과장으로부터 차나 한 잔 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별로 할 일도 없었으므로 회사에 나갔더니, 퇴직이 아니라 휴직이 되어 있었다.　휴직 처리된 이유는 이러했다. 총무과장이 7월 당시 퇴직발령 결재 받으러 중역실에 갔을 때 퇴직사유가 뭐냐고 물어 고시시험 치러 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회사가 싫거나 직장을 옮기려고 퇴직하는 것도 아니고 또 시험이란 낙방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만약 떨어지면 다시 같이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규(社規)에도 없는 휴직 발령을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 달 만에 복직해 다시 일하던 중 그해 12월에 시험 최종합격 발표가 났다. 이제는 정말 그만두겠다고 보고하러 갔으나 또 윗선에서 공직연수 입교할 때까지 계속 근무하라고 했다. 　그에 따라 이듬해 3월 말까지 회사에 다니다가 퇴직하고 바로 이틀 후에 공직 시보로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입교했다.  　이기적인 구성원에게 조직이 먼저 `정`을 준 것이다. 조직은 개인의 `쓸모`를 사랑한다. 이기적인 자가 쓸모 있겠는가! 그러나 그 이기적이던 개인은 조직이 베푼 그 때의 `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모시던 회사 상사들 대부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시절 정든 입사 동기들은 흘러가는 인생에서 어느 듯 60대의 초로(初老)가 되어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다. 　조직문화 차원에서 `정` 있는 조직이 있고 냉엄한 조직도 있다. 이 중에서 전자의 생명력이 더 강하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정`을 받은 자는 떠나서도 마음의 조직인으로 계속 남아주기 때문이다. 　그 D사는 날로 번창하여 현재 그 분야 굴지의 알 찬 기업으로 성장했고 사세는 계속 뻗어가고 있다. 오늘날 경제·사회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의 조직들도 성과만 따질 게 아니라 조직 차원의 `정` 베푸는 노력을 좀 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