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이조시대(李朝時代), 인도의 카스트(caste)제도를 연상케 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적 신분의 구분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그런 직업적 분류 외에도 가족력에 따른 출신성분을 구분하는 반상(班常)제도가 따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소위 양반과 쌍놈이라는 신분의 구분이었다. 당시 양반들은 `사농공상`중에 주로 벼슬아치를 이르는 사(士)와 농사를 짓는 농(農)의 직업을 가졌지만, 소위 공돌이를 지칭하는 공(工)과 장사꾼을 의미하는 상(商)도 체면만 아니면 불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쌍놈이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다름 아닌 사(士)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쌍놈 출신은 제아무리 부(富)를 축적해도 양반은 될 수 없고, 그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신분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씨조선 말엽에 이르러, 사회가 부패하면서 돈으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공공연히 이루어지자, 심지어는 사회적 신분을 구분 짖는 족보(族譜)까지 거래의 대상이 되었으니, 신분 상승의 기회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던 흙수저 서인(庶人)들이 양반(兩班)의 족보를 사들여 신분세탁을 하는 사례가 있었던 모양이다. 쌍놈이 장사를 열심히 하여 부자기 되긴 했는데, 늘 큰 갓 한번 써 볼 수 없는 천한 신분 콤플렉스에 빠져있던 중, 가난한 양반의 족보가 급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거금을 지불, 드디어 양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재물을 가지면, 그다음 명예나 지위를 탐하는 것이 인지상정일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양반이 된 이 쌍놈은 그렇게도 부럽던 그 양반의 지체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항상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다녀야 하고, 여덟 팔자로 팔을 흔들며, 턱을 치켜든 채, 배를 적당히 앞으로 내밀고 걸어야 하는 양반걸음거리가 여간 힘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앉을 때도 항상 허리를 바로 편 채, 가부좌에 가까운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음식을 먹을 때도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며, 입 안의 음식이 밖에 보여서도 아니 된다. 어흠! 하는 목소리도 자못 위엄이 있어야 하며, 아무리 성질이 나도 십원짜리 육두문자(욕설)가 튀어나오면 큰일이다. 매사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심히 불편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바, 어느 날, 신분이 갑자기 바뀌었던 이 쌍놈은, 제기랄, 이리도 불편한 양반을 왜 하려 했던가 후회하며 결국은 양반을 다시 팔아버리기로 결정 했다는 얘기다. 　숫사슴은 숫컷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해 큰 뿔을 머리에 이고 있지만, 그 거대한 뿔 때문에 거동이 심히 불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나뭇가지에 그 뿔이 걸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죽기도 한다. 사람 역시 지위가 높아질수록 거동이 불편하여 매사가 조심스러우며, 그 지위 때문에 사소한 실수로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귀천(貴賤)은 직업에 있지 않다 하여도 사람들은 하는 일이 달라지면 자신의 신분이 달라졌다 생각하고 행동이 변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진아(眞我)는 본래 그대로일 뿐, 달라진 것은 호칭뿐이지 않을까? 　아버지에겐 아들이며, 아들에겐 아버지이다. 그리고 아내에겐 남편이며 남편에겐 아내이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남편이나 아내라는 이름이 붙여질 리 없고, 자식을 두지 않았으면 아버지라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때와 상황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이 자기 것이 아닌 줄 안다면 그는 자유롭고, 타인의 시각으로 보는 귀천(貴賤)과는 무관하게 그는 언제나 스스로 귀한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치인은 공복(公僕)이라 했건만, 혹시 벼슬이라 생각하고 지망했다가, 지금 심히 불편을 느끼는 분들은 아니 계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