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노련한 기업 경영자(CEO) 선배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세상에 정의(正義)란 따로 없다. 이념적으로 보수·진보, 독재·민주 할 것 없이 내게 좋으면 옳은 것이고 정의인 것이다."고 했다.  　물론 이런 시각은 제일의 가치로서 이윤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기업인의 실용주의라 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인간관계의 상대적 속성의 솔직한 한 단면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직 초급 간부로 한창 일하던 시절이었다. 관료 출신의 새 장관 L씨가 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로 불렸다고 한다. 국내 최고학부를 수석 입학·졸업하고 고등고시도 수석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너무 똑똑해서 그런지 조직 내에서 유아독존적이며 성질은 불과 같아서 그 행적에 관해 유별난 일화가 많았다.  　그 때 필자가 모시던 S국장은 정부 내에서 행정관리 능력이 탁월하고 특히 보고서 작성에는 달인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실무급에서 웬만한 보고서를 가져가도 쉽게 핵심이 지적당하고 간단히 수정을 받으면 보고서 수준이 훨씬 좋아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데 이 달인의 보고서가 그 장관에게만 가면 박살이 나듯 쫓겨 나오곤 했다. 　부처 대부분의 간부들이 장관으로부터 막말 욕설을 듣기 일쑤였고 업무는 거의 혹사에 가까웠으며 그 중 S국장이 특히 심한 편이었다. 그의 휘하 실무자들은 새벽 4~5시 정도까지의 야근은 보통이고 사안에 따라 근 한 달씩을 연속해 밤을 새우기도 했다. 오랜만에 일찍 귀가했을 때 어린 딸이 아버지를 몰라 울며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한편 머리가 좋으면서 악랄하다고 평가를 받던 고위 공직자는 지방에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모 광역시 P부시장이었다. 골프장 캐디(caddie)를 클럽으로 때린 이야기는 한 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본인 관련한 텔레비전 보도가 맘에 안 든다고 일요일 사무실에서 공보 계장을 심하게 발로 차고 때렸다. 공무원 단체와 지방 언론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천재 급은 아니나 성벽이 별나고 행동이 요란하여 정부 내에 소문이 자자한 간부들도 있었다. 옛 C부처 Y씨는 차관급 직위까지 올라가면서 열정이 넘쳐 거칠고 전투적인 면조차 있었다. 학생 때 레슬링을 했다는 그는 타 부처와 업무 협의를 할 때뿐만 아니라 부하 직원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안 되면 웃통을 벗고 싸울 자세를 취하는 스타일이었다. 　과거 종합조정기관의 R조정관도 정책 개발과 업무 열정에 경계가 없었다. 그의 부하들에 대한 드라이브는 밤낮이 없었다. 일요일 오후에 갑자기 과장급 이상 확대 간부회의를 소집하는가 하면 직원이 야근하는 밤 11시에 사무실에 나오기도 했다. 새해 1월1일에 신년 정책구상 회의를 하자고 연락이 왔을 때 어떤 과장은 먼 지방의 산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 응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조직에는 이들처럼 본인만 뛰어나서 독선에 찬 변형적 엘리트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이러한 관리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타에 대한 인간적 배려는 없었고 부하들의 신음소리도 듣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들도 꼼짝 못하는 일종의 생태계 천적(天敵)과 같은 직원이 한 명 정도 있다는 것이다. 천재 장관 L씨에게는 심의관 C씨가 있었다. 그는 장관 앞에서 당당했고 어떤 보고서를 가져가도 쉽게 통과(OK) 되었다. 　부하 때린 그 부시장은 직원 O씨한테는 얌전했고 레슬링 출신 간부 Y씨도 K사무관 말에는 온순했으며, 종합정책의 절정고수 R조정관도 M서기관에게는 조용했다. 상급자의 상급자는 아무리 더 세더라도 천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원수지간처럼 쌍방형도 아니다. 천적은 그가 일방적으로 맥 추지 못하는 부하에게 붙는 이름이다. 　조직 사회에서의 가치나 인적관계도 상대적인 것이다. "내게 이로우면 정의"라고 한 선배의 말처럼, 그 폭압적 상급자들도 그의 천적들에게는 좋은 간부들이었을 것이다. 공·사 영역에 영원하고 절대적인 선(善)이나 인간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천적도 변하며 세상 모든 일에 상대성·유동성 자체가 원리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