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같으면, 세상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리며 채널을 돌려버리던 복길 씨가 티브이 화면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북미회담에 부쩍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티브이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조바심 나는 초조감과 기대에 찬 미소가 어려 있었다. 화면 속의 두 남자가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더 포옹했을 때, 복길 씨도 그들처럼 웃었다. 저 젊은 지도자가 진정으로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 복길 씨는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이 떠올랐고, 인민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서히 스탕달로 변신하는 환상에 빠져 가슴이 설레었다. 머지않아 통일이 올 거라는 희망의 불씨 때문이었다.    　스탕달은 1783년 1월 23일에 프랑스의 그로노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만 아는 저속한 변호사였다. 소설`적과 흑`에 창조한 주인공 쥘리앙 소렐의 아버지라는 인물이 그랬다. 스탕달은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이모에게 길러졌는데 평생 이모를 미워했다. 어린 시절 발코니에서 화분에 씨앗을 심다 칼을 떨어뜨려 지나가는 노파를 놀라게 했을 때, 스탕달이 노파를 죽이려고 했다고 몰아세운 이모였다. 그 상처가 오죽했을까.  　그는 왕당파적인 자신의 가정에 반발해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고, 나폴레옹에게 봉사하면서도 독재에는 반대했다. 폭군적인 권위에 반항하며 평생 변함없는 반 권력주의자였던 스탕달은 31세 때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해방운동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 정부를 비방한 죄로 밀라노에서 추방당해 망명생활을 했다.  　복길 씨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개천에서 용 나듯 그런 권력 지향적인 가정환경 속에서도 스탕달 같은 인물이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손이라면 사람을 변신시키는 것쯤 눈 깜빡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 인민복을 입고 희망과 의혹이 섞인 경직된 웃음을 짓는 저 젊은 지도자의 가슴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어루만지면, 그가 스탕달도 되고, 시바이처도 되는 게 아닌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적(赤)은 권력을 상징하는 군복의 빛깔이고, 흑(黑)은 정신적 권위를 상징하는 성직자의 빛깔이다. 미남이며 탁월한 재능과 식견을 가진 가난한 청년 쥘리앙 소렐은 레날 시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레날 부인을 사랑했지만, 도망치듯 헤어진다. 그 후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되어 후작의 딸 마띨드의 변덕스러운 사랑을 받아들이나, 천한 신분의 이유로 결혼을 거부당한다. 후작은 교묘한 수단으로 레날 부인을 협박해 쥘리앙이 귀족계급의 여자를 이용해 출세하려는 비열한이라는 편지를 쓰게 한다.  　상처받은 쥘리앙의 분노가 사랑하는 레날 부인에게 총을 쏨으로써 소설은 파국을 맞는다. 부인이 곧 회복되어 마띨드와 함께 쥘리앙을 구명하지만, 그는 배심원들에게 분연히 말한다. 나는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려 애쓴 한 백성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동정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죄는 더 엄벌을 받겠지요. 스탕달은 주인공 쥘리앙을 통해 당대 프랑스의 계급, 권력사회를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쥘리앙은 사형을 기다리며 레날 부인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을 깨닫고 행복을 느낀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레날 부인을 만류했지만, 쥘리앙이 사형당한 사흘 후 부인도 숨을 거둔다. 복길 씨는 `나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기뻐한다. 신도 나처럼 성실하게 산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줄 것이다`라고 한 스탕달을 생각하며 신을 믿는 지도자는 민중에게 잔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티브이에서는 두 지도자가 포옹하는 장면이 계속되었다. 복길 씨는 스탕달의 염원을 한 아름 보듬어, 젊은 지도자의 머리 위에 모자처럼 얹어놓고, 하나님에게 빌려고 눈을 감았다. 그때 불쑥 머리에 문장이 떠올랐다. 그것이 신이 될 것인가? 식탁인가? 그릇이 될 것인가? `적과 흑`의 한 장면에서 인용한 `라퐁텐의 우화`의`조각가와 주피터 상`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혁명이 다시 일어나 하인이나 하층계급의 손에 권력을 잃을 것을 안달한 귀족들은 비밀회의를 열었다.  　라몰 후작이 열변을 토했다. "`그것이 신이 될 것인가? 식탁인가? 그릇이 될 것인가?`란 말은 바로 가엾은 민중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이어야 한다`고 우화 작가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복길 씨는 아전인수 격의 말을 한 라몰 후작에게 분노했다. 민중을 제압하기 위해 귀족 스스로 자비를 들여 연대를 만들라면서 가여운 민중이라니! 에고와 위선의 인용이었다. `인간은 누구나가 자기의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진실에 대해서는 얼음과 같고 망상에 대해서는 불처럼 타오른다`고 한 라퐁텐의 이 말에 공감한 복길 씨는 젊은 지도자를 위해 더 적합한 우화를 들려주고 싶었다. 　꾀주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고양이는 나무 위에 올라가나, 백 개의 꾀주머니를 가진 여우는 백 개의 구멍에 들어가 백 번이나 개들에게 추격당하다 죽고 만다. 너무 많은 책략은 때로는 중대한 일을 망쳐버린다. 고르는 동안에 시간이 지나가며 모든 것을 시도하다 마니, 한 가지만, 좋은 것 한 가지만 가지는 것이 낫다. 　복길 씨는 티브이를 보고 말했다. "그러니 젊은 지도자여, 라퐁텐의 말을 듣고, 라몰 후작의 위선을 벗겨, 민중의 손에 천둥을 쥐어주시오. 적과 흑과 백이 하나가 되게 폭우를 쏟으시오. 백(白)은 가난한 민중의 빛깔이라오" 그는 적, 흑, 백이 모두 섞여 하나가 되면 어떤 색이 나오는지 가늠해 본다. 그런 환상이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