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영국 유학할 때 두 아이는 초등학생이었다. 한국 복귀하던 해에 한국 기준으로 큰 아이는 5학년, 그 남동생은 1학년이었다. 복귀 반년도 안 남은 어느 날 지역 보건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아이들 치과 검진을 하라는 것이었다. 보건소가 아동 신상과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을까? 알고 보니 학교와 지역 보건센터 간에 기본적인 협조체계가 되어 있었다. 치과검진은 거의 의무적이었다. 물론 검진과 치료비 일체는 무료이다. 　애들을 데리고 가서 1차 검진을 하고 둘 다 충치 치료를 하는 데 약 두 시간 가량 걸렸다. 보호자를 옆에 앉히고 흰 가운의 의료진 두 명이 설명을 해가면서 정성껏 치료를 했다. 충치가 심해 앞으로 서너 번은 더 와야 한다고 했다. 공공의료 서비스는 예약제이고 대기 환자가 많아 빨라야 몇 달 만에 진료기일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 후 각자 한 번씩 더 치료했으나 그 다음 진료일은 복귀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귀국을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린이 충치 치료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한국에 가서 마무리하겠다고 하고 그동안의 치료에 감사를 표한 뒤 집으로 왔다. 　그러던 이삼일 후에 보건소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다른 대기자의 예약을 조정해 두 번 더 잡았으니 치료를 마저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니며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자상한 조치를 취해준 것이다. 한국 의료체계를 후진적으로 보아 의료원조 차원에서 취해준 배려였는지도 모르나 작은 감동을 받았다.　영국의 의료 보장체계는 거의 완벽하며 예약 관리는 엄격하다. 이른바 속행처리(fast-track)는 비용을 더 지불하고 예외적으로 있는 것이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체류 외국인에 대해서도 똑 같다. 의료 보호를 비롯한 사회보장은 대국민이 아니라 인류적 소명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했다. 20년 전 그 때 다른 예약자의 일정과 바꿔서라도 아이들 치과 치료를 마쳐준 데 대해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미국 워싱턴(Washington D.C.) 대사관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는 아이 둘 다 고등학생(high school은 4년제로 9-12학년이다)이었다. 그들은 워싱턴에 바로 인접한 매릴랜드(Maryland) 주 베데스다(Bethesda)지역 공립학교에 편입했다. 운 좋게 미국 전역의 공립고 평가 20-30위권을 유지하는 초 명문 학교였다. 물론 학비는 없다. 학생과 교직원의 약 80 퍼센트가 유태계이며 교육이 매우 짜임새 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학부모 출석 통지서가 왔다. 큰 아이의 수업 일수와 학교생활 관련하여 학생 및 학부모가 동반 출두하는 개별 교무 회의였다. 유독 사춘기 방황이 심한 데다 자라면서 영국·인도 등 영어권을 오간 관계로 언어 외의 학업과목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에만 열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감은 불안했고 당황스러웠다. 학교에 아버지인 필자는 외교관 자존심을 이유로 공무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고 어머니만 가서 모녀가 두 시간여 동안 호된 질책과 훈육을 받고 왔다. 이 또한 자국 학생도 아니고 학비를 내는 것도 아닌데 자국민에 대한 것과 똑 같은 관심으로 교육하고 지도해 준 데 대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몸집이 크면 거인(巨人)이지만 대인(大人)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 땅덩어리가 큰 것만으로 대국(大國)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화적 포섭력`이 있어야 대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미국 같은 선진국 생활에 대한 추억이나 사대적 사고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 차원에서도 피아(彼我)를 구분할 일은 분명히 따로 있다. 교육·의료 등 인류적 가치 영역에 대한 절대적 무차별은 대국 문화의 기본이다. 　이제 우리도 긴 숨으로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필두로 한 생활전파의 세계화(globalization)를 비롯해 환경도 돈(finance)도 세계화된 지 오래이다. 인종도 다민족·다문화 시대이다. 국가 차원의 공적 개발원조(ODA)란 것도 있지만 이는 다른 얘기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천은 중앙정부만의 몫일 수는 없다. 지방자치단체나 기업들에게도 이미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