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 뭐 있나. 한 번은 지인에게 정치인이 가장 곤란해 하는 말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다. 대놓고 물으면 속 고민 안 할 수 있겠느냐는 한마디도 보태주었다. 자신이 아는 한 단체장도 가끔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고 털어놓더라면서. 그 심정이 어떨까 이해는 간다.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하면 본의 아니게 자기자랑이 돼 버린다. 거꾸로 겸손해 하면 돌아오는 건 덕담보다는 또 다른 핀잔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말처럼 당사자를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모는 딜레마가 또 있을까 싶다.　정치인, 특히 단체장에겐 혹처럼 늘 따라다니는 말이다. 또 정치, 선거 이야기를 할 때면 흔히들 하는 말이기도 하고. 입을 떼기는 쉬워도 듣는 입장에서야 이 짧은 한 마디 만큼 큰 건 없을 게다. 뿌리치고 싶다고 뗄 수 있는 꼬리표가 아닌 탓이다. 게다가 최선의 해답만 찾을 뿐 정답도 없다. 그나마 국회의원은 단체장보다는 사정이 훨씬 좋은 편이다. 적당히 에두르고 비켜나갈 거리라도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비해 단체장들은 벙어리 냉가슴이다.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굳이 필자가 질문이 아니라 말이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누가 봐도 궁금함이 빚은 물음이 아니다. 뭔가 속사정이 있는 비판이다. 그것도 긍정이 아닌 부정적인 비판 또는 평가에 가깝다. 물론 정말 몰라서 묻는 경운들 왜 없겠는가. 이 정도면 차분하게 설명하면 되니 그래도 낫다. 최소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할 때에는 달리 하고픈 말이 숨어있다. 감을 잡은 독자들도 있겠다. 우선 서운함과 불만이다. 자신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경우가 그 원인이다. 처음엔 서운하다가 점점 불만으로 변해버린다. 이후엔 마음을 닫고 자기변명과 합리화의 길을 찾는다. 명분 말이다. 사적인 걸 말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뭔가 한 소리는 해야겠고. 그래서 공적영역에 들어가 논리를 찾아온다. 도대체 지역을 위해서 한 게 있느냐고 하는. 이 얼마나 간명한가. 대의를 대변한다는 뿌듯함도 생겨나고, 비판에 힘을 실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정을 알면서도 털어놓는 푸념이다. 필자에게도 가끔 그런 얘기들을 한다. 그러면 정말 아무 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묻는다. 별 말이 없다. 이렇듯 딱히 뭔 일을 했는지 몰라서가 아니다. 행정현장을 매일 보고 듣고 읽는다. 그런데도 비트는 건 나아지지 않는 삶 때문이다. 비판하는 이도 안다. 대통령도 하루아침에 살리지 못하는 살림을 하물며 단체장 한 사람인들. 인간심리는 잘 모르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은가보다. 늘 주체가 아닌 객체, 참여자가 아닌 수혜자로만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왜 이럴까?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얘기처럼 광장에 모인 모래알 대중을 하나로 묶는 정치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언제까지 한 게 뭐 있냐는 소리만 할 텐가. 잘못 된 건 잘못됐다고 하고, 잘한 건 잘했다고 하면 된다. 단체장은 한 집안의 가장이고 주부다. 열심히 가족을 위해 일하고도 해준 게 뭐냐는 소릴 듣는 가장의 마음은 어떨까. 알뜰살뜰 집안 살림 챙기고도 집안일 제대로 하느냐는 애먼 소릴 듣는 주부의 마음은 또 어떨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는 그 심정을 안다. 그 심정이 단체장들의 솔직한 마음 아닐까. 이제 더 이상 맹목적인 비판은 그만했으면 한다. 다툴 일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톡 까놓고 말해 한 일을 모른다면 그 탓은 본인에게 있다. 관심이 있든 없든 매한가지다. 이웃동네 소식은 그렇게 잘 알면서 정작 자신의 지역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면서도 검색 한 번 해보는 수고로움이 그렇게 싫은 모양이다. 뭘 알아야 찬성도 하고 반대도 한다. 그게 아니면 감정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민주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합리성과 옳음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하니 본인의 무관심과 귀찮음을 남의 잘못으로만 돌리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한 게 뭐 있냐고 한다면 스스로 근대의 계몽에 갇힌 존재, 아직 계몽되지 못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독일의 철학자 시어도어 아도르노는 계몽의 이중성을 지적하면서 인간을 소외되고 갇힌 존재, 지배수단으로 전락한 존재로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칸트는 계몽을 스스로에 기인한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라 했다. 미성숙은 타인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란 얘기다.　사뭇 궁금해진다. 지금 이 시대의 시민과 국민이 진정 그런 존재이기를 원하는지. 우리 모두 자신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듯하다. 부디 의식을 깨고 멋진 시민, 멋진 국민으로 되돌아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