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경주를 생각하면 애틋함이 앞선다. 내 유년과 청소년기를 온통 점령하고 있는 미추왕릉과 첨성대, 계림을 감싸 안고 흐르던 천주도랑, 정호승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인두로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길이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얽힌 쪽샘마을의 골목길. 골목 안에는 낮은 처마가 다닥다닥 붙었고 한 구비 돌면 작은 구멍가게, 또 그 뒤로 양과를 만들어 팔던 제과점, 고소한 냄새를 온 동네에 풍기던 참기름방, 겨울철 뜨거운 김을 피워올리던 두부공장의 굴뚝들이 역사소설의 한 장면처럼 출몰했다.　단발머리 여학생이 책가방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목욕탕 골목으로 사라지면 그 어여쁜 뒤태에 넋을 놓아버렸던 청소년기. 주말이면 천주도랑 흐르는 내물왕릉을 지나 향교까지 걸었고, 최부자집을 배경으로 나지막이 형성된 교촌마을의 자드락길에 후두둑 떨어지는 감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겨울철 안압지가 얼면 썰매를 지쳤고 활용사지 너른 들판에 눈이 쌓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서둘러 뛰어들어 투박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때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고 신라천년의 고즈넉한 모습이 오롯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경주의 정체성을 찾기가 어렵다. 도농복합도시의 전형적인 몰개성으로 이 도시가 도대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도시라는 점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고 생뚱맞은 새물내 나는 장식물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원형이 아름다운 것들에 인공을 덧대고 가만히 촌스럽게 나둬야 할 곳에 천박한 치장을 했다. 원도심에는 그리 쏠쏠한 이문이 남을 것 같지 않을 상점들이 근근이 문을 열고 있고 오랜 시장은 상주에 가도, 김포에 가도, 묵호에 가도 볼 수 있는 현대화 과정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도시를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만들고 싶어 한다. 솔직한 심정이지만 경주의 현재 콘텐츠로 그 꿈을 이루기에는 요원하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중국과 일본의 역사관광도시에 비해 규모와 디테일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난다. 경쟁력에서 뒤떨어지고 차별성에서도 실패했다. 중국의 시안과 일본의 교토와 비교했을 때 어느 도시를 찾을 것인지 선택하라면 분명한 답이 나온다. 물가가 싼 것도 아니고 볼 것이 다양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 즐길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밋밋하고 심심한 경주가 국제적 관광도시를 꿈꾸는 자체가 난센스라고 핀잔해도 크게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경주의 관광산업 발전구상은 근시안적으로 이뤄졌다. 당국은 그만한 안목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문가들의 자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앞서가는 도시에 가서 깊이 있는 견문을 가지지도 않은 듯하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는 뭐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다. 그 도시가 그렇게 명성을 얻게 되기까지 기울인 피나는 노력을 곰곰이 새겨봐야 한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경주가 살길은 관광산업이 정답이다. 그러나 그 분명한 답안을 써내는 전략적 접근이 미비하다. 첨성대를 비추는 붉은 색 조명을 거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으며 주말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동부사적지 인근의 교통문제를 해결할 고민도 하지 않고 있다. 얼마든지 가공만 하면 가치가 돋보일 설화 자원을 개발할 노력도 하지 않고 경쟁력 있는 소재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다듬어 앞서가고 통영이 문화와 예술을 특화해 추월해 갈 때 경주는 주어진 조건도 살려내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의 면모는 서툰 개발로 사라져 버렸고 자투리만 남은 한옥마을도 중구난방의 활용으로 조만간 황폐화 할 위기에 놓였다. 그래 놓고 글로벌 관광도시를 표방하다니.　제발 정책 입안자들은 견문을 넓히기 바란다. 이대로 아무런 마스터플랜 없이 부분부분에 대한 개발을 진행한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경주가 되고 말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경주는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도시다. 그렇다면 그 명성에 걸맞은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앞서가는 도시의 성공사례는 벤치마킹을 해야 한다. 지니고 있는 자원은 불변이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지혜는 매우 유동적으로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