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는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화면 속의 인물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미투의 눈길에서 자유로울까, 생각하며 아내는 심각한 남편의 옆얼굴을 힐끔 봤다. 왕년에는 나름 잘나갔던 남편도 이제는 초췌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젊었을 적 남편의 외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적절한 성공도 이루었다. 　아내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젊은 날을 떠올렸다. 그녀의 애를 태웠던 몇 가지 사건이 생각난 것이다. 밤에 몰래 어떤 여자의 전화를 받고, 화를 내며 급히 전화를 끊던 남편에게 누구냐고,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그는 침묵했다. 십 년 후 부부는 한 번 더 여자 문제로 다퉜다. 증거는 없지만 남편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얼굴 모르는 여자의 그림자가 평생 아내를 따라다녔다. 그 생각이 나자 아내는 조금 심술이 나서 물었다. 당신은 깨끗하겠지? 남편이 아내를 노려보더니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하늘이 그의 마음처럼 부옇다. 살아온 날들이 치열했다. 승진하기 위해 동료의 권리를 빼앗았고 권력에 시중을 들었다. 그래도 갈비 부장이니, 대게 부장이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자신의 수가 높았기 때문이었다고 궁색한 위로를 늘어놓았다. 그도 상급자가 되었고, 부하직원이 자주 집을 들락거렸다. 퇴직 일 년을 남겨두고 직속 수하가 공사를 권했다. 페인트 공사, 건물 증축 등 수하의 모사에 엉거주춤 넘어갔다. 정원용 돌 하나에 기천 만원의 국고를 사용했으니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퇴임 전 관행이었다. 그것을 아내가 추궁하는 것이다. 무사히 정년퇴직한 건 행운이었다. 이런 시국에는 아슬아슬하게 지나온 날이 목을 죄는 법이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직원 L의 상냥한 접근을 과대평가한 것일까? 지난날이지만 한때 사랑에 빠진 L이 지금 자신을 고발한다면!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얗게 질려있을 때 베란다 문을 열고 커피를 가지고 온 아내가 짓궂게 놀렸다. 왜 도망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야? L도 나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 신령한 하늘이 알 거라고! 그는 속말을 하며 원망과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눈을 아내에게서 거두었다. 궁지에 몰린 듯 허둥지둥 서재로 들어가 아내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 　아내는 혼자 우두커니 티브이를 보며 생각했다. 고작 백 년을 누리는 인생인데 욕망이란 놈은 천년만년 산다고 부추긴다. 아내는 안방의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화장대 위에 필립 로스의 장편 `죽어가는 짐승`이 놓여있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책이 마음을 흔들었다. 　주인공 케페시 교수는 스텐리 스펜서가 그린 `이중누드 초상: 화가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의 두 알몸을 보며 말한다. 젊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몸, 둘 다 행복하지 않아. 현재에는 무거운 과거가 매달려 있어. 아내는 모든 것이 늘어지고,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제 줄무늬 진 살덩이보다 더 가혹한 일이 닥칠 거야. 자유를 구가하며 욕망을 추구하던 그는 곧 이혼한다. 62세의 나이로 24세의 제자 콘수엘라를 만나면서 욕망은 절정에 치닫는다. 콘수엘라에게 함몰한 케페시 교수는 더는 제자를 만날 용기가 없다. 자신에게 끔찍한 미래의 종말이 오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십 년 후 콘수엘라가 유방암에 걸려 찾아온다. 죽어가는 것이다. 작가 필립 로스는 `죽어가는 짐승`이라는 제목을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에서 가져왔다.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들러붙고 있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그렇게 나를, 영원의 작품 속으로 거두어다오.　책을 덮은 아내는 옷을 벗었다. 축 늘어진 피부와 접힌 뱃살과 메마른 젖가슴이 거울에 비쳤다. 아내에게도 과거의 남자 K가 있었다. K에게 자신은 욕망의 대상뿐이었을까. 콘수엘라가 케페시 교수를 사랑하듯 자신도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녀는 격정에 차서 머리를 흔들었다. 사랑의 감정이 없었다면 대체 K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다른 보상 때문에 거짓 사랑 놀음을 했단 말인가? 영혼 없는 섹스라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나 또한 죽어가는 짐승일 뿐이야! 그녀는 물기어린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다. 　케페시 교수와 남편과 콘수엘라와 그녀 자신이 거울 속에 나란히 서 있는 듯하다. 늙은 작가 필립 로스가 속삭인다. 인간은 욕망 때문에 짐승이 되어가고 결국 죽어가는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