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형편에 해외여행이란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떠나지 못하더라도 소망을 품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이야말로 꿈다운 꿈이라는 것이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인터넷과 티브이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융프라우, 그랜드 협곡, 나미비아, 앙헬폭포, 황산 등 무한한 대자연의 신비를 보며 감동에 젖곤 했다. 　어젯밤도 알프스를 오르는 자신을 상상하다 잠이 들었다. 열기구를 탄 듯 몸이 붕 떠올랐다. 따뜻한 바람을 따라 떠다니다 아래를 보니 대륙과 해양이 그려진 거대한 세계지도가 발밑에 펼쳐졌다. 그는 돈이 가득 든 가방을 껴안고 있었다. 믿기지 않은 지 가방 속을 들여다보다 돈을 한 움큼 집어 공중에 뿌렸다, 자꾸 뿌렸다. 지폐가 하얀 깃털처럼 하느작거리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텅 빈 가방과 그의 몸이 바다에 풍덩! 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때마침 휴대폰 플래너의 알람이 울렸다. 오늘 밤 옛 친구와의 약속이 잡혀있었다. 그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우리, 올해는 갈 수 있겠지? 에그, 또 여행 타령이야? 새 아파트 입주만 하면 천국 여행이라도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아내가 측은한 눈빛으로 물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보다 여행 가는 게 더 좋아? 물론이지. 딱해라, 허구한 날. 적금 하나만 깨면 되지만… 그게, 그렇게 절실한 문제인지, 무엇이 삶의 우선순위인지 모르겠어. 　그는 세계테마 여행을 재시청하며 약속 시간을 기다리다 집을 나섰다. 십 년 만에 만난 친구는 병색 깊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뜬금없이 웬일이야?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가 대답했다. 내가 좀 아프거든. 아프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잖아. 이제 겨우 불혹을 앞둔 친구 입에서 `남은 시간`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필시 깊은 병을 앓는 듯했다. 　성공하기까지 제주도 한 번 가지 않았다는 친구는 병이 나고부터 여행을 시작해서 세계일주를 한 여행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창백한 이마 위에 드리워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친구가 말했다. 인생을 알려면 여행을 해야 해. 삶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이고, 죽음은 여행자의 휴식이지. 모로코의 라바트 해변 가봤어?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성을 끼고 뒤는 끝없는 묘지, 앞은 싱싱한 육체들이 바글바글한 해수욕장이야.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곳이지. 꼭 한번 가 봐.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라는 걸 실감할 거야. 그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삶 자체는 고난이 아닌가. 인생이 삶(고난)과 죽음뿐이라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죽음 너머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다. 　이제 자주 보자며 친구는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돌아가는 내내 깊은 우수에 젖은 친구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로 지은 맨션 옆을 지나가던 그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두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이 명치를 찔러대며 여행이라는 단어를 몰아냈다. 　낡은 아파트 담벼락을 지나갈 때는 문득 절규하는 뭉크가 떠올랐다. 화가 뭉크는 어느 날 친구들과 길을 걷다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 죽을 것 같은 피로와 공포를 느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뭉크의 절규가 그의 가슴을 헤집고 지나갔다. 　산다는 것이 무거운 등짐을 진 고달픈 여행이라면 더더욱 짐을 벗고 쉬어 갈 여유가 필요했다. 짐의 무게나 날개의 크기가 다를 뿐 누구나가 일상을 떠나 자유롭고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는 아내를 설득할 말을 생각하며 바삐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기다린 듯 달려 나온 아내가 말했다. 우리, 어디로 여행갈까? 그는 놀라서 풀쩍 뛰듯이 대답했다.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 그건 부활의 세계라며 아내가 예루살렘을 추천했다. 그렇게도 그악스럽게 돈을 모으던 아내의 변화에 그는 숙연해졌다.　그래,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의미가 상징으로 치환된다면 말이야. 여행이란 행위는 일상 너머로 날아오르려는 날갯짓 같은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