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지나치는 주택가 골목길이 있다. 마을버스를 타면 빠르고 편리하지만 일부러 골목길을 돌아 걸어간다. 아파트 단지와는 달리 주택가의 골목에는 삶의 냄새가 배어나서 좋다. 특히 고만고만한 서민들이 사는 주택가여서 더욱 그렇다. 대문 앞에 내놓은 쓰레기 하나에서도 그 집의 생활을 나대로 읽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즐긴다.　그 골목길에 그 집이 있다. 그 주택가에서 비교적 넓은 뜰을 지닌 그 집에는 대문 옆에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재작년 가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감나무의 붉은 감이었다. 마침 늦가을이라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집에 감나무가 있어도 심한 추위에 척박한 마당이라 여간해선 감이 제대로 달리기 어렵다. 그런데 그 집은 거름을 주어 잘 가꾸었는지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려 있었다. 감도 요즘의 신품종이 아니고 재래종 반시였다. 그리 굵지도 않고 동글납작한 그 모양이 더욱 정겨웠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그 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나는 한참 동안 담장 높이 솟은 그 감을 올려다보았다. 감나무에 얽힌 유년의 추억까지 떠올리면서.　그 뒤 겨울이 되고 세밑이었다. 다시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나는 놀라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가을에 내 눈을 즐겁게 했던 그 붉은 감이 아직도 그대로 감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감은 더욱 빨갛게 익어 홍시가 되었고, 며칠 전의 한파로 얼음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차가운 잿빛 하늘에 매달린 버려진 선홍빛 감! 너무도 이상한 풍경이었다. 　왜 한 해의 결실을 수확하지 않았는지 나는 주인의 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게을러서 감을 내버려둔 것은 결코 아니리라. 그렇다면 저렇게 감이 많이 달리도록 가꿀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어떤 이유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나는 가장 손쉬운 한 가지 사정을 떠올렸다. 감나무 주인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생겨 미처 감을 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갑작스런 병이나 사고가 있었다면 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리라. 그런 추측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면서도 꽁꽁 언 감을 올려다보는 마음은 몹시 안타깝고 쓰라렸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이었다. 무심코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다시 발길이 얼어붙고 말았다. 1년이 흘렀는데 감나무의 풍경이 한 해 전과 똑같았다. 마치 작년의 감나무를 보는 듯했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대문을 두드려 그 사정을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나는 주인의 뜻을 확인하지 못한 채 답답하고 혼란스런 마음으로 그 집 앞을 떠났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오고, 한파도 닥치고, 내일 모레면 세모다. 나는 며칠째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그 집 감나무를 찾아가는 일 때문이다. 나는 여러 날 전부터 벼르면서도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하고,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도 그 집 앞을 피해 다른 골목길로 갔다. 만약 또 회색빛 빈 하늘에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본다면 이번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릴까 겁이 나서다. 　　세모(歲暮)　　어느 집 감나무에 아직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해가 다 가도록 　따지 않았다　　허공에 걸린 채 홍시가 되고　한파의 침공에 얼음덩이로 변했다　　날아가던 새가 쪼아보아도　헛일이었다　　그 아래 지나며 고개 젖히니　낙목한천落木寒天에 점점홍點點紅이라　　주인의 깊은 뜻 알 길 없으나　문득 헤아리기를　　자식은 여의어서 종種을 잇고　열매는 거두어서 내년을 기약하느니 　■약력　·1946년 강동면 단구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　·1984년 <소설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동무> <사과나무 향기> 전기소설 <아　 아 님은 가지 않았습니다> 시집 <나비 문신을 　 한 사람> 등 출간　·조연현문학상, 한국소설가협회상 수상　·현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소설 담당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