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제 조직에서의 의사 결정은 대부분 `결재`(決裁)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결재로써 공식적인 문서도 생산되는 것이며 그 중 인사에 관한 결재 문서는 공·사 부문에 공히 거의 다 영구 보존이 될 정도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대 초 전자문서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모두 오프라인(offline)으로 종이문서에 직접 서명하거나 날인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정부의 과거 인사담당 부처인 구 총무처 인사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 인사결재 문서는 그 바탕 종이와 서식이 일반 인사문서와 달랐다. 보임계장의 날인으로 결재가 시작되면 과장, 국장, 차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가 서명한 후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재가를 받는 것이다. 이 인사결재는 대부분 신속히 진행되며 매우 긴박하게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서둘러 인사결재가 진행되던 중 이제껏 한 번도 없던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장관 서명 후 국무총리를 건너뛰고 곧바로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 결재가 나버렸던 것이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서명이 있으면 그 원천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 또 대통령의 인사결재 진행 과정에 일종의 보조기관으로서의 국무총리는 관행적으로 그 내용에 관여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총리는 통상 요식적인 서명을 할 뿐이어서 본인이 그 기억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총리가 해외 출장 등으로 서명할 수 없을 경우에는 대통령 결재 후 나중에 후열(後閱)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그 날의 경우는 국무총리가 국내에 있었으나 서명이 빠져 실무적으로 찜찜한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엉뚱한 발상이 고개를 든 것이다. 어차피 본인이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므로 위필(僞筆)(세칭 `가라사인`)해 넣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명 필체가 평이해서 흉내 내기도 쉬웠다. 　직원 중 테스트를 거쳐 제일 비슷하게 쓰는 자로 하여금 막 `가라사인` 하려던 순간, 노련한 별정직 선배가 단호히 말렸다. 효력에 관계가 없다면 그냥 비워두어야지 그렇게 위조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 말에 모두 움찔해져 그만 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 모두들 깜짝 놀랐다. 아픈 부위가 더 잘 부딪히는 법인 듯 하필 국무총리가 그 인사서류를 찾은 것이다. 그 동안 총리 결재를 건너 뛴 일도 없었거니와 결재 끝난 서류를 총리가 찾는 경우 또한 매우 드문데다 `가라사인`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그 인사서류가 아닌가! 차관에게 사실 그대로 보고하여 총리께 이실직고 하고 건너뛴 데 대한 용서를 받았다. 　알고 보니 그 인사 대상자 중 총리의 지인이 있었고 그가 총리한테 신고를 하여 발령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결재한 기억이 없어 찾았던 것이다. 만약 그 날 그 총리 서명 칸에 `가라사인`을 해 넣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총리의 성벽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으나 아마도 인사과장을 비롯한 실무자 몇 명은 중징계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일련의 풍경을 생각하면 우습기조차 하다. 그 때 몇 명이 둘러서서 소위 `가라사인` 연습을 하던 장면이나 며칠 후 국무총리가 그 서류를 찾았을 때 놀랐던 상황을 잊을 수가 없다. 　다소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죄도 악도 멀리 있지 아니하며 또한 죄악은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그리고 집단적으로 저질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인사서류 사례에서 그 노선배 직원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비록 저질러지려다가 제어된 `정직`이었지만 이처럼 `정직`은 중요한 것이다. 결재의 정도(正道)! 그 덕목 제 1조는 `정직`이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또 가정에서조차 어떠한 경우에도 위조는 결코 아니 된다. 모든 형태의 문서나 의사 결정에 있어 여하한 단계의 결재자도 양심에 따라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정직`은 언제나 보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