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티님, 가을이 깊어가는 이 밤, 당신이 오길 기다립니다. 처음 만난 그날이 생각나요. 곧게 하늘로 뻗은 깃털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올 때,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고 바람은 따스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불렀지요. 뽀뽀. 뽀봉. 뽀뽀뽕. 입맞춤처럼 부드러운, 세상에서 하나 뿐인 다정한 목소리였어요. 다들 당신의 깃털이 인디언 추장의 모자를 닮았다지만, 부채처럼 활짝 편 깃털은 왕관이나 면류관처럼 보였어요. 　나는 짹짹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이 가까이 오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을 지켜보기만 했어요. 먹지 못해 바짝 마르고 못 생긴 내게, 당신은 초록 열매를 주셨지요. 그 열매를 오래오래 먹었습니다. 우듬지까지 날아오른 나를 좀 보세요. 이만큼이나 건강해졌어요. 하지만 당신을 기다리느라 목이 더 길어진 것 같지 않아요? 하늘 저편으로 귀 기울입니다. 　하얀 달이 회화나무를 비추네요. 도서관 정문 앞에는 학자 수(學者樹), 영어로도 스칼러 트리(scholar tree:학자나무)라 불리는 회화나무가 두 그루나 있지요.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이래요. 나는 어쩐지 이 나무가 좋아져 여기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어요. 기억나시나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점심시간이면 회화나무가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사랑을 나누던 연인을요.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어느 날 연인들의 원망과 탄식 섞인 말소리를 듣고 나무에서 내려왔어요. 계속 시험에 떨어진 그들은 절망했어요. 청년이 한참동안이나 이마를 감싼 손을 떼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았어요. 소망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하시우. 하다보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말이우, 젊은이에게 딱 맞는 제일 좋은 선물을 줄 거유.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오늘밤, 문득 그 말이 생각나네요. 나도 선물을 받고 싶은 게지요. 청년은 사업을 시작했고, 아가씨는 조그마한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지요.　언제부턴가 청년의 말수가 줄고 점점 침울해졌어요. 어떤 치명적인 고통이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사업이 잘 안 되었나 봐요. 그들 사랑에 금이 갈까 애가 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아가씨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하더군요. 그 말에 내가 더 기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니까요. 　그들은 회화나무 아래에 하얀 차를 세워두고 여행을 떠났어요. 그들의 사랑에 안도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웠어요. 그들을 보니 당신이 더욱 그리워지더군요. 당신은 어디쯤 오시는가요? 다들 여름에 오신다고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말처럼, 생각지도 않은 선물로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숲 속으로 가봤어요. 당신이 어린 새끼들을 먹여주던, 상수리나무의 텅 빈 구멍을 들여다봅니다. 당신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우수수, 가을바람이 붑니다. `우울`이란 시가 떠오르네요. 폴 베를렌의 시집`랭보에게`에 실려 있다며 청년이 읊었던 시지요.　―장미는 온통 붉기만 했고, 담쟁이는 온통 검기만 했다. 　다정한 사람아. 그대 움직이기만 해도 내 온갖 절망 다 되살아난다. 　그러면 아가씨는 `초록`이라는 시로 화답했지요. 　―나 왔어요. 아직도 이슬에 젖어 있어요. 이마에 맺힌 이슬, 아침 바람에 얼어요.　그대 발치에 누워, 지친 이 몸 달래줄, 귀하디귀한 그 순간들 꿈꾸게 해주어요. 마지막 연을 외려는데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힘껏 날아갔어요. 연인의 차가 번호판만 남겨둔 채 시커먼 쇳덩이로 변해 버렸어요. 불기가 가시지 않은 나무에 기대어 졸다 날이 밝았어요. 　폴리스 라인 테이프가 햇빛을 퉁겨내며 파닥거려요. 여행을 떠났던 아가씨가 경찰과 이야기하고 있네요. 혼자 돌아와 버린 아가씨는, 생을 마감하려는 청년의 절망을 뒤늦게 깨달았대요. 서둘러 도움을 청해 사막에서 구조되었다는데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군요. 설마 그가 차에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울먹이는 아가씨…지금 아가씨는 곧잘 읊었던 폴 베를렌의 이 시를 마음속으로 외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께선, 사랑으로 제게 상처를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