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는 그 본래 목표가 있다. 소신(所信)은 이 본래 목표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직 목표 외의 상급자 의중이나 다른 정황을 살피는 것은 소위 정무적(政務的)일 수는 있어도 소신과는 거리가 멀다. 중앙·지방의 공직에서 국장급(또는 그 상당 직위) 이상이라면 사업을 기획 또는 집행할 때 어느 정도 정무적 판단도 필요하다. 그러나 과장급 이하는 정무적인 고려보다 원칙적 사고와 논리적 기준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실무자의 소신론이 제기되는 것이며 과장급 직위는 이 실무자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국장급 이상은 어떤 일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부하 직원들이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지원하는 것이다. 이에 부응해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은 일 처리에 있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고금(古今)에 금언(金言)이다. 실무자의 원칙주의자적 접근은 일의 추진을 올바르게 하고 조직의 전통과 생명선을 이어가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조직의 하위 직원 중에 유독 정무적 판단에 능하거나 타협적인 접근에 아이디어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 이들도 조직에 긴요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용도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통 큰 실무자 즉 소위 `거물`이 행한 일들 중에는 원칙을 벗어난 것들이 종종 발견되어 후일에 조직이 힘들거나 위험하게 될 수도 있으니 관리자는 주의해야 한다.　2000년대 초 구 중앙공무원교육원 교육팀장(과장급) 시절의 일이다. 소관 업무 중 `5급 승진자 과정` 운영이 있었다. 이 과정은 각 부처 6급 직원(주사)들이 5급(사무관)으로 승진하기 위해 이수해야 하는 교육이었다. 이 교육과정이 당시는 3주였고 그 기간 중 마지막 3주째는 현장교육의 일환으로 2박3일 간의 단체 `산업시찰`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개발연대의 대표적인 산업현장을 위주로 국내 명소를 돌아보는 견학코스였으나 교육생 동료들 간 소통과 친목을 도모하는 시간으로서의 의미도 상당했다. 어느 날 직속상관인 교수부장(국장급)과 교육원장(차관급)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산업시찰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지시를 했다. 짧은 교육기간에서 3일간의 외부 여행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이제 국내 산업현장은 초급공직자나 일반 국민들이 웬만한 곳은 다 가봤으므로 시대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타당성이 있는 지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사자인 교육생들의 반응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산업시찰을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나의 수학여행으로서 분임원이나 교육 동기생들 간 친목 도모와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소중한 기회라는 것이며 폐지할 경우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하자 두 상관들은 무슨 소리냐며 공직자들이 놀러가자는 것이라고 완강했다.　이십여 년을 넘게 종사하여 대부분 사십대 후반이 된 실무급 공무원들의 바램을 생각할 때 존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반응만을 이유로 상관들의 지시나 방침에 반대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밤새 고민한 결과 취지와 개념을 전환해 접근했다. 확실히 산업현장은 한물이 갔다. 그러나 세상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탁월한 성취에 이른 사례가 있고 그 현장에서 얼마든지 배울 것이 있다. 그래서 프로그램 이름을 `문화탐방`으로 변경하고 방문지역도 감동적인 문화현장 위주로 바꿨다. 보고서를 작성하여 교수부장부터 차례대로 밀어붙였다. 꼬박 이틀이 걸려 두 상관들이 양보를 했다. 그래서 그 `산업시찰` 프로그램이 죽지 않고 `문화탐방`으로 재생되어 오늘에도 유사한 이름으로 교육생들 간 의미 있는 상호 소통과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무자는 우선 소신이 그 생명이다. 다만 독불장군식의 소신이 아니라 규정과 원칙에 충실한 소신이어야 한다. 더러는 그냥 반대도 아니 된다. 대안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적(私的)인 동기는 아니 된다. 이는 관리자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실무자의 소신에도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소신 있는 실무자에게는 처음부터 "○○님 지시사항이다"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