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白磁) 달항아리는 그야말로 몸통이 둥글고 풍만하여 보름달을 닮았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책 `영혼의 미술관`에서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가 보여주는 `겸손`의 미덕을 찬양한다. 　표면에 작은 흠들이 남아 있고, 불완전한 유약을 머금어서 색이 바랜데다, 반듯한 타원형도 아닌 윤곽…. 그러나 백자 달항아리는 이 모든 결함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는 마치 신분 상승을 향한 경주(競走)에 무관심 한 듯 보이고, 자신을 과도하게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지혜가 담겨 있다. 그래서 항아리는 궁색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존재에 만족할 뿐이다. 세속의 지위(地位) 때문에 오만하거나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또는 이런저런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안달하는 사람에게, 이런 항아리를 보는 경험은 용기는 물론이고 강렬한 감동을 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이 만난 그 달항아리 백자의 미덕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조선 선비의 이상적인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흔의 서양화가 조희수 선생을 생각하면 나는 백자 달항아리가 떠오르고 조선의 선비 얼굴이 겹쳐진다. 　해방 이후 남한의 첫 미술학교인 경주예술학교 첫 졸업생인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지나오는 동안 한눈팔지 않고 꾸준히 화가의 삶을 살아온 분이다. 중앙 화단에서 내려와 경주에 터 잡고 향토의 풍경 속에 세월의 이야기를 덧칠하며 살았다. 　선생은 우리들에게 작품을 잘 팔지 않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그림을 내놓는 대상은 진정 그림을 알고 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리려면 그릴 수도 있으나 그것은 진정한 작가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선생이 말하는 `진정한 작가`의 품격이 백자 달항아리의 `선비다움`을 빼닮지 않았는가. 　실제로 선생은 언론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며, 공적을 기리고자 상을 추천해도 거절한다. 그렇게 고집 센 어른이 손자뻘인 나에게는 `형님`으로 호칭하라 호통을 친다. 일가인 데다 항렬로는 형뻘이니 나로서는 난감하게도 `아흔의 형님`을 둔 셈이다. 작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서 뵈었을 때 나는 큰소리로 "형님! 형님!"을 외쳤는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뻘쭘해진다.　선생은 얼마 전까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이끼처럼 끼어 있는 월정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의 그림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바람에 풍화하듯 느리고 오래 완성되어 간다. 양동마을을 담기 위해 삼 년을 양동마을에 살았고, 하회마을을 담고자 사 년을 하회마을과 경주를 오갔다. 그렇게, 선생이 지닌 많은 이미지는 세월을 거스르고, 세속을 거스른 뒤 도달하는 고상함에 닿아 있다. 선생은 거기서 예술의 혼을 불태워 온 셈이다. 　"글을 쓸라카믄 그림도 봐야 한데이" 선생은 손자뻘 아우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여느 화가로부터도 들은 적 있는 조언이었으나 단어 하나하나가 척추를 가진 몸처럼 직립하여 내게로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선생의 `글`과 선생의 `그림`은 나의 글과 약삭빠르고 눈치 빠른 젊은이들의 그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선생이 살아 온 이 나라의 현대사는 어쩌면 선생의 글과 그림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선생은 지금 낯선 글과 그림들의 난무를 바라보며 당황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변화를 타락이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마땅히 품고 닦아야 할 어떤 것을 마치 박물관의 백자 달항아리처럼 멀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개관한 솔거미술관이 `지역원로작가 초대전`의 첫 주자로 조희수 화백 초대전을 갖고 있다. 9월 25일까지 계속될 전시회에는 양동마을과 하회마을 등의 풍경을 담은 스물일곱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나에게는 이 전시회가 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선생이 말하는 그 글과 그림의 유전자를 우리 시대가 끝내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그것이다.